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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삐용

영화에세이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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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삐용(Papillon)

 

최용현(수필가)

 

   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 문득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빠삐용(Papillon)’이다. 여자 주인공 없이도 150분의 상영시간이 결코 지루하지 않았고,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의식주 외에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자유라는 것을 깨우쳐준 영화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메시지.

   살인죄 누명을 쓴 주인공이 사막 한가운데로 걸어오고 맞은편에 재판관과 배심원들이 앉아있다. 그는 나는 살인을 하지 않았어요. 나는 결백합니다.’ 하고 무죄를 주장한다. 그러자 재판관은 그건 맞지만 너에게는 분명 죄가 있다, 네 죄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다. 그것은 인생을 낭비한 죄다.’ 하며 유죄를 선고한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죄를 시인한다.

   프랑스어로 나비라는 의미인 빠삐용에서 주인공이 형무소에서 꾼 꿈의 한 장면이다.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큰 죄라는 메시지가 지나온 인생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보던 학창시절에는 무심코 지나쳤지만 이제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가슴에 새긴 나비 문신 때문에 빠삐용으로 불리던 프랑스 청년 앙리 샤리엘은 1931년 유흥가에 놀러갔다가 한 사건에 연루되어 살인자 누명을 쓴다. 종신수(終身囚)가 된 그는 남미 적도 부근에 있는 악명 높은 형무소에 수감된다. 거기서 11년 동안 혹심한 더위 속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강제노역을 하는데, 여덟 차례에 걸쳐 탈출을 시도한다.

   ‘빠삐용은 앙리 샤리엘의 동명(同名)의 자서전을 토대로, ‘혹성탈출’(1968)패튼대전차군단’(1970)을 연출한 프랭클린 J. 샤프너 감독이 1973년에 만든 영화이다. 개성이 뚜렷한 두 캐릭터를 등장시켜 고립상황에서의 인간의 심리변화와 대응양상을 심도 있게 탐구한 걸작이다.

   남미의 프랑스령() 기아나형무소로 향하던 죄수 수송선에서 포주살해범 빠삐용(스티브 맥퀸 )은 화폐위조범 드가(더스틴 호프만 )와 만난다. 많은 돈을 항문 속에 감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드가는 늘 다른 죄수들이 노리는 표적이 되었고, 빠삐용이 그를 보호해주면서 두 사람은 진한 우정을 쌓아가게 된다.

   드가를 위해(危害)하려는 죄수들을 빠삐용이 저지하는 과정에서 한 바탕 소란을 일으킨 탓에 두 사람은 중노동을 해야 하는 정글지역으로 쫓겨 간다. 힘겨워하던 드가는 동료 죄수의 시체를 보고 구토를 하다가 간수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는데, 이를 보다 못한 빠삐용이 그 간수를 폭행한다. 결국 빠삐용은 총을 쏘며 쫓아오는 간수들을 피해 도망친다.

   다시 붙잡힌 빠삐용은 독방에 2년 동안 갇혀있어야 하는 처벌을 받는다. 그는 좁은 독방 안에서도 운동을 하며 체력을 단련한다. 교도소의 간부를 매수하여 책상에 앉아 사무를 보는 보직을 맡게 된 드가는 목숨을 걸고 자신을 보호하려다 독방에 갇힌 빠삐용의 급식통에 매일 코코넛 반쪽을 넣어주도록 조치한다.

   그러나 그 특혜는 얼마 안 가 들통이 나고 만다. 특식을 보내준 사람의 이름을 대라는 교도소장의 추궁에 빠삐용은 모른다고 시치미를 뗀다. 그 결과, 맹물이나 다름없던 급식이 반으로 줄어들고 6개월간 햇빛마저 차단당하게 된다. 빠삐용은 생니가 빠지는 극심한 영양실조 속에서 감방에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를 잡아먹으면서도 끝까지 드가의 이름을 대지는 않는다.

   독방생활을 끝내고 다시 일반 감방으로 돌아온 빠삐용은 조금씩 체력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는 다시 치밀하게 준비하여 드가와 동료 죄수 한 명을 포함, 셋이서 탈주를 시도한다. 정글을 빠져나와 어렵게 배를 구해 어느 해안가에 도착했으나 발목을 다친 드가와 동료 죄수는 추격대에 붙잡히고 만다.

   빠삐용은 천신만고 끝에 추격대를 따돌리고 도망치다가 탈진해서 쓰러지는데, 눈을 떠보니 원주민이 사는 마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동안 머무르며 체력을 회복한다. 그리고 검문검색을 피해 한 수녀원에 들어간다. 그러나 믿었던 수녀원장이 신고를 하는 바람에 붙잡혀 그 끔찍한 독방에서 다시 5년을 보내게 된다.

   형기를 마친 빠삐용은 기력을 거의 소진한 채 다시 수용자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악마의 섬으로 보내진다. 이곳은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어서 배조차 띄울 수 없는 천연요새 같은 곳이다. 와보니 드가가 먼저 들어와서 정착하고 있었다.

   빠삐용은 또 다시 탈주를 계획한다. 여기서 육지까지는 약 100리이다. 매일 벼랑 위에 앉아서 풍랑을 연구하던 그는 조류를 타고 이틀만 떠가면 육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계산을 해낸다. 빠삐용은 이곳에서 돼지를 기르며 살겠다는 드가와 뜨거운 작별포옹을 한다. 그리고 코코넛 껍데기를 가득 채운 자루를 던져놓고 100m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다.

   파도를 타고 떠가는 빠삐용의 모습이 차츰 멀어져 가면서, 주제음악 ‘Free as the Wind’가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빠삐용은 자유를 찾았다. 그리고 여생은 자유의 몸으로 살았다.’는 자막과 함께 영화는 끝이 난다.

   실제로 빠삐용의 실존인물인 앙리 샤리엘은 탈주에 성공한 후, 베네수엘라에서 광부, 도박사, 은행털이범, 요리사, 호텔지배인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자유롭게 살았다. 범죄시효가 만료되어 자유의 몸이 된 뒤에는 꿈에도 그리던 고국 프랑스를 방문하여 8일 동안 파리에서 머무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3년 스페인에서 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마지막에 빠삐용이 뛰어내린 절벽의 위치는, 인도네시아 발리에 있는 울루와뚜 절벽이라는 설과 호주 시드니에서 가까운 왓슨즈 베이의 갭 파크라는 설이 팽팽하게 맞서 있는데, 사진을 비교해보면 둘 다 영화 화면과 약간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미국령 사이판 섬의 자살절벽이라는 설이 맞는 것일까?

   빠삐용이 코코넛 자루 위에 누운 채 파도에 실려 가는 장면에서 물속에서 잠수부들이 자루를 밀어주는 모습이 얼핏 보여 눈에 좀 거슬린다. 옥에 티다. 어쨌거나, 빠삐용이 바다 위를 떠가면서 허공에다 뱉어낸 대사를 보면 그가 얼마나 자유에 목말라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놈들아! 난 아직 살아있다(Hey, you bastards, I’m still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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