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1974년 4월, 국산영화 한 편이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관객 10만 명을 넘기도 힘든 시절, 단일 개봉관에서 105일 동안 46만 4천명이 입장하는 경이적인 신기록을 세운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주말엔 상영관인 서울 국도극장에서 명보극장 쪽으로 200m에 이르는 줄이 이어졌다.
‘별들의 고향’, 고교 재학 중에 등단을 하고서도 군에 입대하면서 다시 신춘문예에 응모하여 훈련소 연병장에서 단체기합을 받다가 당선 통보를 받은 70년대 최고의 인기작가 최인호가 조선일보에 연재한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이 소설은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100만부를 돌파한 베스트셀러였다.
처음 정한 제목은 ‘별들의 무덤’이었으나 ‘무덤’이 조간신문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아 그의 사부인 황순원 소설가의 조언을 받아들여 ‘고향’으로 바꾸었다. 최인호의 막역한 친구인 조감독 이장호가 기라성 같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이 소설의 판권을 따내 정식 영화감독으로 데뷔하였다.
이장호 감독은 여주인공의 과거회상 형식의 플래시백(Flashback), 한 템포 빠른 장면전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관음적인 화면, 에코 효과를 넣은 사운드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그 결과, 그는 대종상 신인감독상과 백상예술대상을 연거푸 수상하여 단숨에 장래가 촉망되는 신예감독으로 부상한다.
이 영화는 유신체제 하에서의 과도한 검열과 TV의 급속한 보급 등으로 사양길에 접어들던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젊은이들을 극장으로 모여들게 했다. 전국의 술집 아가씨들이 너도나도 이름을 ‘경아’로 고쳤을 정도로 여주인공 ‘경아’는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가 되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청순하고 발랄한 아가씨 경아(안인숙 扮)는 직장에서 한 남자(하용수 扮)와 교제하면서 장밋빛 미래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다. 그러던 중 그 남자가 요구하는 육체관계를 거절하지 못하고 응하다가 임신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그 남자가 딴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첫사랑에 실패한다.
실연의 아픔을 가까스로 이겨낸 경아는 부인과 사별한 중년남자(윤일봉 扮)와 결혼한다. 잠시 행복한 나날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그 남자는 죽은 전처에게 과도한 집착을 보이다가 경아가 임신중절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음을 알게 되자 갑자기 돌변한다. 결국 경아는 그 남자에게서도 버림받는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경아는 술집에 호스티스로 취직하여 세 번째 남자(백일섭 扮)와 함께 살기 시작한다. 그 남자는 화류계 주위에서 무위도식하는 건달이고 기둥서방이었다. 경아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술에 절어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 무렵, 경아는 한 술집에서 우연히 화가 문오(신성일 扮)를 만나 그의 집에 따라가고, 바로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경아는 자신을 살갑게 대해주는 그에게 의지하며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행방이 묘연한 자신을 찾아다니던 세 번째 남자가 문오와 동거하는 집으로 찾아오는 바람에, 경아는 다시 그 기둥서방에게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세월이 흐르고, 경아는 그 남자에게서도 버림을 받아 다시 문오를 찾아온다. 그러나 이미 알코올 중독자가 된 경아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환상을 좇는 여자가 되어 있다. 이때 문오와 경아가 나누는 대화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경아, 오래간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아, 행복해요. 꼭 껴안아 주세요. 여자란 참 이상해요. 남자에 의해서 잘잘못이 가려져요. 한 때는 나도 결혼을 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지나간 것은 모두 꿈에 불과해.”
“아름다운 꿈이에요. 내 몸을 스쳐간 모든 사람들이 차라리 사랑스러워요. 그들이 한 때는 사랑하고 한 때는 슬퍼하던 그림자가 내 살 어디엔가 박혀 있어요. 아,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저씨만 여기 계시는군요.”
그러다가 잠이 든 경아, 아침에 눈을 떠보니 문오마저 떠나버리고 없다. 이제 갈 곳이 없어진 경아, 자아를 상실한 채 자신을 원하는 남자한테 닥치는 대로 몸을 던지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느 눈 오는 날 수면제를 먹고 혼자 눈 덮인 벌판을 걸어가다가 쓰러져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첫 남자와 잘못 되는 바람에 인생이 고약하게 꼬여버린 우리들의 누이 경아, 그때 경아가 처한 상황은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로 올라온 많은 시골처녀들이 급격한 산업화와 성 개방 풍조와 맞물려 술집 호스티스로 일하게 된 당시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 70년대의 일그러진 청춘의 참혹한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 영화는 음악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최초의 작품이기도 했다. 가수 겸 작곡가 이장희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소녀가 울고 있네’, ‘한잔의 추억’ 등이 수록된 OST앨범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또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를 부른 청아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가수 윤시내인 것은 상상의 허를 찌른다.
이 영화를 만든 서울고 출신 삼총사 중에서 이장호 감독은 아직도 영화계에서 활동하고 있고, 이장희는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울릉도에서 멋진 노후를 보내고 있다. 최인호 작가는 어느 시골에서 침샘암 투병을 하다가 최근에 타계했다.
여주인공 안인숙은 이 영화가 나온 이듬해 결혼 발표와 함께 은퇴를 했는데, 몹시 궁금하고 그립다. 윤일봉은 오랫동안 은막에서 활약하다가 현역에서 물러나있고, 신성일은 아직도 간간이 영화를 찍으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첫 남자 하용수는 패션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고, 기둥서방을 맡은 세 번째 남자 백일섭은 TV에서 푸근한 아버지 역을 하고 있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30여년 만에 ‘별들의 고향’을 다시 보니, 대학 1학년 때 처음 보고 눈물을 삼키며 극장을 나서던 기억이 새롭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마지막에 경아가 눈 덮인 벌판에서 쓰러지는 장면에서 왜 그리 가슴이 미어지는지….
오늘은 퇴근길에 그때의 대학친구들을 불러내 함께 술도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감정을 잡고 나지막이 노래도 불러 보리라.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터질 것 같은~ 이 내 사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