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E.T.와 타임머신

에세이(수필)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10:53

본문


E.T.와 타임머신

 

최용현(수필가)

 

   어느 잡지에서 1990년대 이전에 나왔던 영화들 중에서 흥행 순위별로 100편의 작품을 선정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1위가 E.T였고, 2위에서 5(4위는 배트맨)까지는 스타워즈 1.2.3이 차지했다. 1위에서 5위까지를 몽땅 SF장르인 공상과학영화가 휩쓴 셈이다.

   두꺼비에다 목을 쭉 뽑아놓은 것 같은,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허구의 괴물E.T가 온통 세계를 열광케 한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도 대단한 선풍을 불러 일으켰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E.T가 그토록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왜일까?

   나이가 들어도 공상과학영화를 좋아하는 건 철이 덜든 탓, 아니면 공상을 좋아하는 천성 때문일 게다. 이런 류의 SF영화가 들어오면 안 보고는 못 배긴다. 혹성탈출, 슈퍼맨, 타임머신, 스타워즈, E.T., 크로스 인 카운터, 백 투 더 퓨처, 토탈 리콜, 에이리언.

   이들 중에서 E.T는 지구의 소년과 한 외계인 사이의 우정을 다룬 휴머니즘 영화였고, 어릴 때 본 혹성탈출과 어른이 되어서 본 타임머신은 지구의 미래에 대해 심도 있게 접근을 시도해 본 영화였다. 후자의 두 영화가 내 취향에 꼭 들어맞아 깊이 인상에 남았다.

   ‘타임머신(time machine)’4차원 세계인 시간 속으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기계인 바, 인간의 꿈이 담겨져 있는 상상 속의 차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문명 비평가이며 소설가인 웰스(H.G.Wells, 18661946)가 쓴 공상과학소설의 고전 타임머신에서 비롯되어 정착된 이름이다.

   「백 투더 퓨처시리즈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로 여행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스토리가 사적(私的)인 것이어서 내 기대와는 맞지 않았다.

   웰스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히치콕의 새의 남자주인공 로드 테일러가 주인공 과학자로 나오는타임머신을 오래 전에 TV에서 보았는데(가이 피어스가 나오는 2002년 작 타임머신은 리메이크이다), 그 때 본 장면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그 줄거리를 소개해 본다.

   인류의 미래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진 한 청년 과학자가 드디어 타임머신을 발명해 낸다. 그는 혼자서 그 차를 타고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 미국과 소련간의 대규모 핵전쟁으로 인한 제3차 대전과 그 후의 폐허 모습이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고, 그가 탄 타임머신은 화산폭발로 인해 용암 속에 묻히게 된다. 그 속에서도 타임머신은 쉬지 않고 달린다.

   드디어 장구한 세월이 흐른 후 풍화작용으로 인해 그 차는 다시 산 밖으로 나온다. 타임머신의 눈금이 80만 년의 경과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타임머신에서 내린다. 푸른 초원, 만개한 꽃과 열매, 그 속에서 한가롭게 뛰놀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

   아! 파라다이스. 그는 인류의 미래 모습에 흡족해 한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하나같이 얼빠진 사람들뿐이다. 알고 보니 이들은 땅속에 살면서 밤에만 나오는 식인종들이 방목해 놓은 먹이였던 것이다. 이곳엔 문명도 없었고 역사도 없었으며 단 한 권의 책도 없었다. 그가 켠 성냥불을 보고 놀라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그는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가공할 핵폭발로 인하여 인류가 거의 멸망하고, 일부는 식인종으로 변이되어 땅속에 살아남아 지상에 남아있던 얼빠진 인간들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통분한다. 그리고 앞장서서 식인종들과 싸우지만 역부족을 느끼고 결국 타임머신을 타고 현세로 돌아온다. 집에서 이들에게 줄 책 몇 권을 들고 다시 그 시대로 향해 달려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 작품이 세인의 주목을 받은 것은 수십만 년 후의 지구의 모습, 즉 식인종이 지배하는 세계를 화면에 시현(示顯)함으로써 현대 물질문명의 종말을 통렬히 공박한 점일 것이다. 이 소설이 써진 연대나 그 내용으로 보아 핵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는 메시지도 담겨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친 김에 인류의 미래를 다룬 영화 얘기를 하나 더 하자. 중학교 때 본 혹성탈출이다. 궤도를 이탈한 미국 우주선 하나가 우주의 미아가 된 채 떠돌아다니다가, 지상시간으로 2,000년이 지난 후 어느 낯선 혹성에 불시착하게 되었다.

   이곳은 원숭이가 지배하고 있는 혹성으로 문화수준은 지구의 몇 백 년 전과 비슷했다. 우주선의 탑승자들은 이곳에서 원숭이들의 포로가 되어 바보처럼 살아간다. 그러나 주인공(찰톤 헤스톤 )은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하는데, 알고 보니 이곳이 낯선 혹성이 아니라 바로 지구요, 미국 땅이었다.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땅속에 비스듬히 묻힌 자유의 여신상이 진한 페이소스로 가슴에 남았었다.

   여기서도 원숭이가 지배하는 지구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류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다. 타임머신이 허구의 기계를 통한 시간 여행으로 수십만 년 후의 지구의 모습을 상상해 본 것이라면, 혹성탈출은 길 잃은 우주선을 등장시켜 이천 년 후의 지구의 모습을 상상해 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낙관론도 있고 비관론도 있지만 후자가 더 우세한 것 같다. 첨단과학의 눈부신 발전 속도로 미루어 보아 장밋빛 미래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 같은 데도 비관론이 우세하다는 것은 기막힌 역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불과 몇 십 년을 사는 인간이 천 년이나, 몇 십 년 후를 생각해 보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까짓 식인종의 세상이 되든, 원숭이의 세상이 되든, 아니면 바퀴벌레가 지구의 주인이 되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아니다. 그래선 안 될 것이다. 이제 다시 서두의 E.T얘기로 돌아가 보자.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고도의 문명을 쌓아온 인간이, 그러나 물질문명의 종언(終焉)이라는 비관적인 미래 앞에 서 있는 인간이 외계인 E.T에게 열광한 것은, 그 외계인이 지구의 미래에 대해 어떤 낙관적인 해답을 가져다줄 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 아니었을까?*


'에세이(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망사항  (0) 2018.12.22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0) 2018.12.22
직장인이 삼가야 할 말 10선  (0) 2018.12.22
서울에서  (0) 2018.12.22
술과 시(詩)  (0) 2018.12.22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