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희망사항

에세이(수필)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11:06

본문

 

희망사항

 

최용현(수필가)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나오는 여자

  내 얘기가 재미없어도 웃어주는 여자

  난 그런 여자가 좋더라

  머리에 무쓰를 바르지 않아도 윤기가 흐르는 여자

  내 고요한 눈빛을 보면서 시력을 맞추는 여자

  김치 볶음밥을 잘 만드는 여자

  웃을 때 목젖이 보이는 여자

  내가 돈이 없을 때에도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없는 여자

  멋 내지 않아도 멋이 나는 여자

  껌을 씹어도 소리가 안 나는 여자

  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짧은치마가 어울리는 여자

 

 

  노영심 작사, 작곡으로 변진섭이 불러서 크게 히트한 희망사항이란 노래의 앞부분 가사이다. 그의 제2집 레코드판에 수록된 이 곡은 음조(音調)가 기존의 틀을 크게 벗어나 있어 별로 기대를 하지 않은 듯 뒷면의 마지막 곡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타이틀곡인 너에게로 또다시보다 더 히트가 될 줄이야.

   대중가요가 히트하려면 가사와 곡, 그리고 가창의 삼위(三位)가 대중의 구미에 맞아 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인기 있는 가요는 그 시대 대중의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곡은 1990년대의 젊은이가 좋아하는 여성상에 대한 하나의 시사(示唆)가 되리라 생각된다.

 

         새까만 눈동자의 아가씨

         겉으론 거만한 것 같아도

         마음이 비단같이 고와서

         정말로 나는 반했네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70년대 초 남진이 불러 크게 유행한 대중가요 속의 여성상과 비교해 보면 그동안 세상이 많이 변화했음을 실감할 수가 있다. 이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엔 남녀의 사랑에 관한 노래도 모닥불 피워 놓고 마주 않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이런 식이었다.

   「희망사항이란 노래는 좋게 얘기하자면, 재치가 번쩍이는 가사에다 기존의 틀을 과감히 탈피한 곡의 구성, 변진섭의 달콤한 가창력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사를 찬찬히 뜯어보면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거나 사실성에 문제가 있는 부분이 더러 있다.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검토해 보자.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는 다리가 늘씬한 여자를 지칭하는 것이니 각선미가 없는 여자는 처음부터 제외가 된다. ‘밥을 많이 먹어도 배 안 나오는 여자는 한 마디로 있을 수 없다. 밥 많이 먹는 여자 치고 허리가 가는 여자는 없다. ‘내 얘기가 재미없어도 웃어주는 여자는 실성한 여자 아니면 골이 빈 여자일 것이다.

   ‘머리에 무스를 바르지 않아도 윤기가 흐르는 여자는 별로 어렵지 않다. 샴푸로 감고 린스로 광내면 된다. ‘내 고요한 눈빛을 보면서 시력을 맞추는 여자는 이 노래의 가사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인데, 불행히도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다. ‘시력(視力)’시선(視線)’으로 고쳐야 옳다.

   ‘김치 볶음밥을 잘 만드는 여자는 별 거 아니다. 김치 넣고 볶음밥을 만드는 건 알고 보면 라면 끓이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웃을 때 목젖이 보이는 여자는 헤픈 여자이거나 좀 덜 떨어진 여자일 것이다. ‘멋 내지 않아도 멋이 나는 여자는 말이 쉽지 웬만한 여자 모두를 기죽이는 말이다. 바탕이 멋있는 여자라야 멋 내지 않아도 멋이 나기 때문이다.

   ‘껌을 씹어도 소리가 안 나는 여자는 별 거 아니다. 입을 다물고 씹으면 누가 씹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짧은치마가 어울리는 여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뚱뚱한 여자 치고 다리가 예쁜 여자는 없다. 있다면 가분수(假分數) 체형의 여자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돈이 없을 때에도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여자뒤에 나오는 내가 울적하고 속이 상할 때 그저 바라만 봐도 위로가 되는 여자’ ‘나를 만난 이후로 미팅을 한 번도 안한 여자이 부분은 문자 그대로 이 주인공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청바지, 무스, 김치, 볶음밥, , 짧은치마, 미팅 등을 20년 전의 노래 가사에 나오는 어휘들과 비교해 보면 실로 엄청난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여자는 어떨까?

 

   ‘까만 눈동자에 꿈을 담고 있는 여자

   ‘사뿐사뿐 걷는 모습이 예쁜 여자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뒷모습이 예쁜 여자

   ‘치마 밑에 종아리가 예쁜 여자

   ‘웃을 때 하얀 치아가 예쁜 여자

   ‘얼굴이 하얘서 안경을 쓰면 이지적으로 보이는 여자

   ‘짓궂은 얘기를 하면 얼굴이 빨개지는 여자

   이런 여자가 너무 고전적이어서 별 볼일 없다고 한다면 한 가지만 더 덧붙여 본다.

   ‘맥주 한잔 마시면 요염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여자

 

   그러나 이건 아무래도 필자의 희망사항일 테고, 변진섭의 희망사항뒷부분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내가 울적하고 속이 상할 때 그저 바라만 봐도 위로가 되는 여자

    나를 만난 이후로 미팅을 한 번도 안한 여자

    랄랄랄 ~

    난 그런 여자가 좋더라

 

   이 노래는 말미에 웬 여자가 이렇게 반박(?)하는 걸로 끝을 맺는다. 필자가 보기에 사족(蛇足)같은데.

 

     여보세요, 날 좀 잠깐 보세요

      희망사항이 너무 거창하군요

     그런 여자한테 너무 잘 어울리는 난 그런 남자가 좋더라.*

 

'에세이(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0) 2018.12.22
E.T.와 타임머신  (0) 2018.12.22
직장인이 삼가야 할 말 10선  (0) 2018.12.22
서울에서  (0) 2018.12.22
술과 시(詩)  (0) 2018.12.22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