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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입성의 추억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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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입성의 추억

 

최용현(수필가)

 

   2월의 마지막 날, 나는 저녁을 먹고 막차로 읍내로 나왔다. 밀양역에서 인철이를 만나 각자 집에서 가져온 이불보따리와 옷가방을 들고 심야에 출발하는 서울행 무궁화호를 탔다. 지난번 대입 시험에서 인철이와 같은 대학에 합격하는 바람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동창인 인철이가 이제 대학까지 동창이 되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수학여행 때 처음 가보았던 서울, 이제 대학생이 되어서 가는 것이다. 그때도 밤차를 타고 갔었지. 새벽에 서울이 가까워 오면서 차창 밖으로 보이던, 난생처음 보는 회색 아스팔트는 얼마나 신기했던가.

   밤에 총천연색 글씨가 차례대로 나타났다가 차례대로 사라지곤 하던 네온사인을 쳐다보며 온통 정신을 빼앗겼었다. 남산 어디서였던가. 동전을 넣고 가속페달을 밟으면 앞으로 나가는 1인용 플라스틱 자동차에 뿅~가서 계속 그것만 탔었다. 처음으로 전차를 타던 기억, 창경원에서 동물들을 구경하던 기억을 더듬으며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희미하게 동이 터오고 있었고, 기차가 막 수원역을 지나고 있었다.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타고 학교를 찾아갔다. 경비실에 이불보따리를 맡겨 두고, 학교 주변의 전봇대와 담 벽에 쓰인 하숙생 구함글씨를 보고 하숙집을 찾아 나섰다.

   조그만 마당이 있는 소박한 한옥 방을 구했다. 인철이와 한 방을 쓰기로 했다. 그 집은 전문 하숙집은 아니었고, 중년 아주머니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남는 방 하나로 하숙을 치는 집이었다. 큰아들은 군대 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작은아들은 고등학생이었다. 주인아저씨는 직업 없이 빈둥빈둥 노는 한량 같았다.

   동네 가구점에서 책상과 의자, 옷걸이를 샀고, 비키니옷장도 하나 구입했다. 수강신청을 하고 필요한 교재를 하나씩 구입하고 나니 가진 돈이 금방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돈이 많이 든다며 부모님께서 용돈을 좀 넉넉하게 주신 덕분에 그래도 약간의 여유는 있었다.

   서울생활 한 달쯤 되어서야 말로만 듣던 명동거리를 걸어볼 수 있었다. FM방송 음악을 들으려고 조그만 라디오를 사면서 늘 갖고 싶어 하던 만년필도 하나 샀다. 이것들은 중학교 2학년 때 반에서 1등 했다고 아버지가 사주신 스위스제 손목시계, 작년에 부산에서 재수할 때 남포동에서 장만한 선글라스, 라이터와 함께 내 재산목록 1~5호가 되었다.

   4월 중순에 접어들자, 캠퍼스에 봄기운이 완연했다. 노란개나리가 차츰 빛을 잃어가나 했더니 어느새 캠퍼스 곳곳에서 철쭉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바람이 불기도 했지만, 잔디밭에 띄엄띄엄 서 있는 라일락은 진한 향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이 일찍 끝나서 2학년 선배들끼리 학교 대운동장에서 벌이는 정법대학과 상경대학의 야구 라이벌전을 보러 갔다. 관중석에 과우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응원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선글라스를 쓰고 관중석에 앉아 새로 산 라디오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카펜터스의 ‘Top of the World’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5-4, 6-6으로 시소게임을 벌이며 재미있게 경기를 벌이더니 결국 내가 응원하던 정법대학이 케네디스코어라는 8-7로 상경대학에 지고 말았다. 야구연습을 열심히 해서 내년에는 꼭 정법대학의 선수로 출전하리라 다짐하며 하숙집으로 향했다.

   나는 하숙방에 들어오자마자 라디오를 꺼내 책꽂이 위에 올려놓고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시계도 풀어서 책상위에 올려놓고 발을 씻으려고 막 양말을 벗는데 문 앞에서 인철아!’ 하는 소리가 났다. 방문을 열어보니 2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마당에 서있었다.

   내가 인철이는 아직 집에 안 들어왔는데요.’ 하며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그 남자가 대뜸 ‘J대 체육학과에 다니는 김국진을 아느냐?’고 반문했다. 국진이는 고교 동창인데, 나와 특별히 친하지는 않았지만, 인철이와는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다. 안다고 했더니 자신이 국진이의 형이라고 했다.

   나는 아 네, 형님. 조금만 기다리시면 인철이가 올 겁니다.’ 하면서 그 남자를 방으로 모시고 잠깐만 앉아계세요.’ 하고 말하고 타월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 방 바로 앞에 간이수도와 세면시설이 있다.

   5~6분쯤 지났을까? 내가 머리를 감고 막 발을 씻고 있는데, 그 남자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오늘은 다른 약속이 있어서 그냥 가야겠다며, 이제 하숙집을 알았으니 며칠 내로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 남자를 대문 앞까지 배웅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책상 위에 올려둔 시계가 보이지 않았다. 아차, 그 남자! 나는 후다닥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 보았으나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었다. 다시 방에 들어와 찬찬히 살펴보니 책꽂이 위에 올려두었던 라디오가 보이지 않았다. 옷걸이에 걸어둔 재킷 주머니를 뒤져보니 라이터와 선글라스도 없어졌고, 안주머니에 꽂아둔 만년필도 보이지 않았다.

   지갑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속에 들어있던 돈만 없어졌을 뿐.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음 달 유학비(?)가 올라올 때까지 버티는데 쓸 용돈 일부를 책상서랍에 넣어두었는데, 내가 집에 돌아와서 잠긴 책상서랍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돈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점이다.

   없어진 돈은 큰돈이 아니라서 별로 아깝지 않았다. 애지중지하던 내 재산목록 1~5호가 한꺼번에 사라진 그 상실감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 어떻게 마련한 재산인데.

   내가 망연자실한 채 방 안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인철이가 들어왔다. 학과 친구들과 당구치고 오느라 늦었단다.

   “국진이는 장남이라 형님이 없어. 사촌형이면 모를까.”

   내가 하는 이야기를 다 듣고 인철이가 말했다. 그러더니 한 가지 짚이는 게 있단다. 지난주에 우편엽서에다 우리 하숙집 약도를 그려서 국진이가 다니는 J대 체육학과로 보냈단다. 나와 함께 있다며, 시간 나거든 우리 하숙집으로 놀러오라고 썼단다.

   “틀림없어. J대 우편함에서 엽서를 본 그 놈이 나를 노리고 왔는데, 때마침 집에 있던 네가 당한 거야. 서울 입성 한 달 반 만에 드디어 신고식을 했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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