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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병 유감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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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병 유감

 

최용현(수필가)

 

   더벅머리로 논산훈련소로 떠난 지 꼭 일 년 만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휴가를 나온 내가 조금도 들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했을 게다. 집에 도착한 첫날부터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다 보니 날짜는 금방 지나갔고 어느새 귀대일자를 며칠 앞두게 되었다.

   그때서야 떠올랐다. 휴가기간 동안 주민등록증을 갱신해 오라시던 중대장님의 말씀과 애인이 없으면 애인 하나 구해놓으라는 고참들의 당부가. 여자한테서 편지도 오고 또 면회도 오고 그래야 군대생활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며, 여자를 꼬실(?) 때는 절대로 첫 휴가 왔다고 하지 말고 말년휴가 왔다고 해야 한다고 고참들이 친절하게 코치까지 해주었다.

   그러나 저러나 이대로 가다가는 애인은커녕 여자한테 말도 한번 못 붙여보고 귀대하겠는 걸, 그러면 고참들과 동료들이 날 우습게 생각할 텐데. 생각하면 할수록 군대에 들어오기 전에 애인 하나 만들어놓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입대했었다. 1학년 때 미팅을 두 번 했는데 맘에 쏙 드는 파트너를 만나는 행운은 없었지만, 첫 미팅 때 만난 파트너는 그런대로 얘기가 통했었다. 두세 번 더 만났지만 흐지부지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내가 좀 더 적극적이었어야 했나 하는 자책을 해보기도 했지만.

   군대생활 하면서 애인이 없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은 고참 들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는 일이었다. 내가 쓴 글이 전우신문에 몇 번 실리고부터 중대에서 글 잘 쓴다고 소문이 나는 바람에 고참 들이 부탁한(?) 연애편지를 써주느라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던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자괴감을 느꼈던가.

   귀대일자가 바로 눈앞에 다가옴에 따라 나는 차츰 절망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 25일 휴가를 다 까먹고 귀대일자를 꼭 하루 앞두고 주민등록증을 갱신하러 면사무소에 갔다. 그때가 주민등록증 갱신기간이라 그런지 창구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있었다.

   나도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하늘이 무심치 않았는지 거기서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한 여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한 사람 건너 앞에 서있는 여자, 그 여자가 힐끔 뒤돌아보는 순간 갑자기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훤칠한 키, 엷은 하늘색 코트,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 창백하리만치 하얀 얼굴, 이지적인 까만 눈-. 월척이다! 우리 면에도 이런 가인(佳人)이 있었더란 말인가. 나는 혼자 가만히 쾌재를 불렀다.

   일을 끝내자마자 밖으로 뛰어나오니 그녀가 버스정류장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버스에 오르는 그녀를 따라 나도 버스에 올랐다. 읍내로 가는 버스 안에서, 옆에 붙어 필사적(?)으로 말을 건 보람이 있어 우린 읍에서 함께 내렸고, 처음 만난 사이답지 않게 웃으며 다방에 들어갔다.

   안주희. 우리 면에서 태어나 이곳 OO여고를 졸업했으며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한 지 2년 남짓 되었단다. 주민등록증을 갱신하려고 일부러 휴가를 내어 고향에 왔으며 며칠 후에 상경할 것이라고 했다.

   고향에 온 김에 친구들이나 만나볼까 하고 읍내에 나온 것이란다. 내 초등학교 여자동창들이 그녀의 여고 동창인 것으로 보아 나와 연배가 비슷했다. 서울에서 오빠 집에서 기거하고 있는데, 오빠가 군에 장교로 복무하고 있어서 군대 얘기를 자주 듣는다고 했다.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처럼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고 있다고 했다.

   우린 점심 먹는 것도 잊고 서로의 이야기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휴가 올 때 김 병장님한테서 교육받은 대로 거짓말을 했다. 마지막 휴가를 왔으며 내년 봄에 제대를 한다고. 그때 나는 사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내 말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내가 근무하는, 서울 근교에 있는 부대의 약도를 그려주고, 서울에 가면 부대로 면회를 가겠다는 약속을 받고 그날 우린 제법 연인처럼 헤어졌다.

   드디어 귀대 일의 아침이 밝아왔다. 몸과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으나 주희가 면회를 올 것이라 생각하니 다시 기운이 솟았다. 상경 길 기차 안에서도 온통 주희 생각뿐이었다. 앞으로 편지도 하고, 휴가 때는 만나서 데이트도 하고, 그러면 남은 군대생활 2년이 금방 가겠지.

   내가 귀대를 한 후 고참 들에게 주희를 만난 이야기를 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들은 고참 들은 주희가 면회를 오지 않을 거라고 했다. 한번 만나서 그 정도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는 여자가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러나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주희가 온다고 한 약속을.

   내가 면회 왔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귀대한 지 한 달쯤 지난 어느 화창한 토요일 오후였다. 면회 온 사람이 여자라는 말을 듣고 나는 주희임을 직감했다. 귀대한 날부터 여태까지 토요일마다 혼자서 애를 태우고 있었지 않았던가. 드디어 그녀가 면회를 온 것이다.

   나는 외출 때 입기 위해 옷장에 고이 모셔 놓은 군복에다 반들반들 윤기가 흐르도록 닦아놓은 군화를 신고 중대장님으로부터 외박 증까지 받아 쥐었다. 면회실로 뛰어가면서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주희와 함께 버스를 타고 서울에 나가 먼저 영화를 보고 그 다음에 저녁도 먹고, 어두워지면 한강 둔치에 가서 분위기를 잡고 다가가서.

   면회실에 들어서니 노란 블라우스를 입은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주희였다. 귀대한 그날부터 단 하루도 주희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있었던가. 뛰어가서 덥석 껴안고 싶었으나 마음뿐이었다. 나는 용감하게 거수경례를 붙이고 주희 앞에 마주 앉았다. 주희도 환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순간, 주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한 줄기 냉소가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인가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 어찌 알았으랴! 황홀한 재회의 기쁨을 채 나누기도 전에 주희의 까만 눈이 일그러지며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다시 일어서고 말 줄을.

   “아니, 일등병이세요? 병장이라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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