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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에세이(수필)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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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최용현(수필가)

 

   높고 파란 하늘이다. 먼 산언저리의 무성하던 푸르름이 조금씩 야위어 노랗게,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간다.

   가을이 되면 시인이나 시인 지망생이 아니더라도, 가을에 특별히 기억나는 애틋한 사연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문득문득 가슴을 스쳐가는 쓸쓸함 같은 것을 느낀다. 나이에 맞지 않게 뚫린 가슴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가을병이다. 가을은 대기 중의 공기가 온통 허무라는 작은 입자로 가득 차있어서 호흡하는 모든 생물이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는 어느 수필의 글귀가 떠오른다.

   엊그제 오후던가, 사무실에 조그맣게 켜놓은 라디오에서 어느 여고생이 보내온 사연이 소개되고 있었다. 청취자가 보내온 사연을 읽어주고 신청곡을 들려주는 FM프로에서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집안이 조용하고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안방에서 음악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방 문을 살그머니 열어보니 엄마가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물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패티김의 구슬프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참 만에 내가 들어온 것을 알고 너 언제 왔니?’하며 후다닥 눈물을 훔치며 일어나셨다.

   사십대 중반인 엄마에게도 눈물지을 사연이 있었구나, 나 때문에 그 회상에서 깨어났구나. , 좀 늦게 올 걸, 그날따라 일찍 집에 들어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우리 엄마를 눈물짓게 한 그 사람이 우리 아빠가 아니어도 좋다(?), 다시 그 곡을 어머니 혼자 조용히 듣게 해 드리고 싶다며 신청한 곡은 박춘석 작사, 작곡으로 패티김이 부른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사랑할수록 깊어 가는 슬픔의 눈물은 향기로운 꿈이었나

  당신의 눈물이 생각날 때 기억에 남아있는 꿈들이

  눈을 감으면 수많은 별이 되어 어두운 밤하늘에 흘러가리

  아 그대 곁에 잠들고 싶어라 날개를 접은 철새처럼

  눈물로 쓰여진 그 편지는 눈물로 다시 지우렵니다

  내 가슴에 봄은 멀리 있지만 내 사랑 꽃이 되고 싶어라

 

   작곡가 박춘석. 60년대와 70년대를 풍미했던 우리나라 가요계의 우뚝 솟은 별이다. 그의 히트곡은 제목을 열거하기가 벅찰 정도로 많다. 당시의 인기가수 치고 그의 곡을 부르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자, 남진, 나훈아, 패티김, 문주란.

   그의 곡은 감미롭고 애잔하다. 그의 곡이 그토록 사랑을 받은 것은 우리 국민의 정서에 꼭 들어맞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언젠가 TV에서 그가 색이 짙은 안경을 쓰고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고 가을에 잘 어울리는 사람 같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수십을 헤아리고도 남을 그의 주옥같은 히트곡 중에는 그 자신이 직접 작사한 곡이 더러 있다. 그의 가사는 연시(戀詩)처럼 절절한 그리움과 회한, 그리고 가슴 에이는 사연들로 꾸려져 있다. 문학소녀처럼 유리알 같은 감성으로 우수 비애 고독 추억들을 엮어낸다. 사랑의 열병을 앓아본 사람일까.

   그가 직접 작사를 한 곡 중에서 몇 곡만 가사를 적어본다. 불후의 명곡인양 학창시절에 노트 뒷장에 적어 놓았던 것들이다. 젊었을 때 이 곡을 부른 안다성 씨의 온통 희어진 머리를 얼마 전에 TV에서 보았다. 아마도 지은 지 40년은 넘었으리라. 바닷가에서

 

    파도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나 홀로 외로이 추억을 더듬네

    그대 내 곁을 떠나 멀리 있다 하여도

    내 마음 속 깊이 떠나지 않는 꿈 서러워라

    아- 새소리만 바람 타고 처량하게 들려오는

    백사장이 고요해

    파도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흘러간 옛날의 추억에 잠겨 나 홀로 있네

 

   이번엔 애달픈 사연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주제곡이라도 되는 것처럼 애지중지하는 노래이다. 문주란의 허스키한 저음에도 실렸고 패티김의 감미로운 음성에도 실렸던 곡이다. 그가 쓴 가사 중에서 가장 처절한 곡이리라. 초우

 

    가슴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칠 때

    갈 길 없는 나그네의 꿈은 사라져

    비에 젖어 우네

    너무나 사랑했기에 너무나 사랑했기에

    마음의 상처 잊을 길 없어 빗소리도 흐느끼네

 

   요즘 젊은이들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발로 딱딱 장단 맞춰가며 듣기에는 어떨는지.

   다음은 그가 쓴 가사 중에서 필자가 특별히 좋아하는 곡 중의 하나이다. 탱고 리듬에 담은 이 곡은 최양숙의 독특한 음색에 실려 사연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황혼의 엘레지

 

    마로니에 나뭇잎에 잔별이 지면

    정열에 불이 타던 첫사랑의 시절

    영원한 사랑 맹세하던 밤

    아- 흘러간 꿈 황혼의 엘레지

 

   「가을 편지와 함께 최양숙의 대표곡이다. 그런 독특한 음색과 짱짱한 가창력을 갖춘 가수가 요즘은 참 드문 것 같다.

   편지를 쓰자. 이 가을, 편지를 쓸 대상이 없는 사람은 사무실에서 집으로, 아내에게 편지를 쓰자. ‘편지 같은 소리하고 있네. 징그럽게 여편네에게 무슨 편지를 써?’하고 콧방귀 뀌지는 말자. 아무렇지도 않고 어디 예쁠 것도 없는 아내이지만 그 동안 함께 부대끼며 살아온 사연은 있지 않겠는가.

   혹시 알랴. 편지 받은 아내가 감격한 나머지 비자금까지 꺼내서 무궁화 다섯 개짜리 호텔의 뷔페식당만큼 저녁상을 차려 놓고 기다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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