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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시(詩)

에세이(수필)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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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시()

 

최용현(수필가)

 

   몇몇 사람들로부터, 온갖 헛소리를 매월 잡지에다 늘어놓으면서 어찌 술에 대한 글은 한 번도 쓰지 않느냐는 얘기를 들어왔다. 글쟁이라면 술과 여자, 담배는 필수과목이 아니냐는 거였다. 주색잡기(酒色雜技) 중에서도 술이 으뜸이고, 그 다음이 계집, 그 다음이 잡기이거늘 술을 빼놓고서 어찌 생을 음미하는 글을 쓸 수 있느냐는 얘기도 들었다.

   일국(一國)의 정치, 기업의 상담(商談), 심지어 인사(人事)문제 까지도 술자리에서 이루어지지 않느냐,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는 술로 풀어야 되지 않느냐, 또 모르는 사람이라도 술 한 잔 같이 하면 금방 친해지지 않느냐는 얘기도 자주 들어왔다.

   상당부분 공감이 가는 얘기이다. 나 자신, 술을 즐기는 편이 못되어서 술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별로 갖고 있지 못하고 있고, 사회생활 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술엔 역시 문인(文人)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정치인들의 술자리는 어쩐지 야합하고 모사(謀事)하는 자리 같은 데다 재수 없으면 누구처럼 총 맞아 그때 그 사람될까 두렵고, 사업하는 사람들의 술자리는 뇌물먹이고 흥정하는 자리 같아 별로 그럴 듯 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문인들의 술자리는 우선 화려하지 않고 풍류가 있으며, 또 무엇보다도 생산적이지 않는가. 시선(詩仙) 이태백처럼 술 한 잔에 시 한 수 정도는 나오지 않더라도.

   전후의 암울했던 시절인 1950년대, 깨어있는 의식을 오직 술로써 침잠(沈潛)시켜 오던 가난한 시인 박인환이 지은 세월이 가면 이란 시는 곡으로 붙여져서 애절하고 감미로운 샹송처럼 아직도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

 

   그가, 술병에 별이 떨어지고 상심한 별이 가슴에서 부서질 만큼 취해서 살던 그가, 약간씩 페시미즘에 젖어서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을 위해 쓴 목마와 숙녀라는 시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면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중략)………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허무를 안고 있으면서도 도시적인 에스프리를 가득히 담고 있는 이 시는 인생에 갓 눈뜬 소년소녀들이 책갈피 속에 끼워 놓고 교과서처럼 애송하는 시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것이었다. 나는 무슨 지도자도 아니며 정치가도 아닌 것을 잘 알면서 사회와 싸웠다. 시에 대한 본질적인 정조와 신념만은 무척 지켜온 것으로 생각한다.’

그가 시집의 후기(後記)에 써놓은 글이다.

   그는 1956320, 명동에 나가 엉망이 되도록 술에 취한 채 집에 돌아와 쓰러져 그길로 영영 일어서지 못하고 서른 한 살의 일기를 마쳤다. 멋있는 시인 하나를 어쩌면 술 때문에 잃었지만, 또 술 때문에 우리들은 그의 주옥같은 시를 가지게 되었다.

   남의 시를 베껴 써서 원고료 타먹는다는 욕들을 각오하고 내가 좋아하는 시 하나만 더 소개 하고자 한다. 조지훈의 사모(思慕)라는 시이다.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이미 잃어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눈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 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한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또 한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잔은 이미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사랑하는 여자를 남에게 빼앗긴 사람이 반쯤 취해서 혼자 가슴을 쥐어뜯으면서 읊조려 봐야 제 맛이 나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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