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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에세이(수필)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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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최용현(수필가)

 

   ‘서울이라는 말은 우리민족의 애정과 동경(憧憬)이 담긴 수도(首都)를 뜻하는 순수 우리말이다. 그 어원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신라 때부터 수도인 경주를 서라벌이라고 부르던 것이 차차 변형이 되어 서울이 된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우리의 선조들이 고려조 때의 개성이나 조선조 때의 한양도 서울이라고 불렀다고 하니 서울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의 수도 -어디가 되었든- 를 지칭하는 말인 셈이다. 지금은 현재의 서울 땅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되어 버렸지만.

   서울은 지금 어디까지 왔는가? 얼마 전, ‘전국은 지금이라는 아침 TV프로에서, 자가용 승용차와 자전거가 목동에서 동시에 출발하여 여의도 KBS방송국까지 도착하는 모습을 생중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자전거를 탄 사람이 KBS에 도착하여 휴게실에서 콜라를 마시고 있을 때, 승용차를 탄 사람은 아직 여의도에 진입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서울의 현주소이다. 승용차와 자전거가 속도경쟁을 하는 것 자체가 서울은 이제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 돼버렸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여기서 자전거가 이겼다는 사실은 현재 서울의 교통실상이 어떤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의 삼분의 일만한 땅 서울에 천만 명이 넘는 인구가 북적대고 있다. 그뿐이랴, 3백만 인구의 인천, 100만에 육박한 수원, 부천, 성남, 안양을 비롯하여 고양, 과천, 광명, 구리, 의정부 등 인근 위성도시까지 감안해 보라. 서울은 이미 섣불리 손댈 수가 없는 거대한 괴물,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 모든 사회문제의 종합 전시장이 돼버렸다. 불과 40년 전인 1960년대만 해도 서울의 모습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강 건너 영등포엔 불빛만 아련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

           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 들 무엇하나

           궂은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1960년대 초 은방울 자매가 히트시킨 마포종점이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마포는 전차 종점이었고 강 건너 영등포에 가려면 나룻배를 타야 했다. 당시 여의도에는 비행장이 있었다. 이때만 해도 남산에는 반딧불이 날아 다녔고, 청계천에서는 빨래도 하고 수영도 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6.25전쟁이 끝난 뒤인 19542, 유명한 육체파 여배우 마릴린 몬로(Marilyn Monroe)가 주한 미군을 위문하러 방한했었다. 언젠가 TV에서, 그녀가 여의도 비행장에서 트랙을 내려섰을 때 서울 남자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장면을 보고 괜히 심통이 나서 나는 부모님을 원망(?)했었다. 내가 며칠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기저귀를 차고서라도 그 환영 인파 속에 끼일 수가 있었을 텐데.

   필자가 서울에 온 1974년만 해도 부천이나 성남의 인구가 5만 명쯤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불과 30여 년 만에 20배로 늘었다. 앞으로 10년 또는 20년 후의 서울 모습은 필자의 아둔함으로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거꾸로 서울의 옛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서울 땅에 우리의 선조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아득한 삼한시대부터였다. 그 후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가의 흥망을 걸고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였던 것은 한마디로 모두 이곳 한강유역의 비옥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고려 때엔 풍수지리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곳을 중시하여 남경(南京)이라 했다. 도선(道詵)의 비기(秘記)목멱산(남산)에 왕기가 서렸다.’고 하여 한양천도를 계획, 한 때 도성도 짓기도 했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한양이 명실상부한 한반도의 서울이 된 것은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뒤엎고 새 왕조를 세운 뒤부터였다. ‘한양은 이()씨의 도읍이라는 전래의 도참 영향도 있었고, 또 당시 조정의 실세인 정도전과 하륜, 국사인 무학대사 등의 끈질긴 노력으로 한양천도가 성사된 것이다.

 

           첩첩한 산들이 경기(京畿)를 두르고

           큰 강이 수도를 아름답게 끼고 도네

           기막힌 정경이 천생으로 이루어지니

           참으로 한양에 도리가 균등 하구나

 

   이 시대의 명사(名士)인 권근이 쓴 최초의 서울찬가이다. 북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등과 남쪽을 감싸고 흐르는 한강이 이룬 장엄한 경관을 노래한 것이다. 여기서 도리(道理)가 균등하다 함은 한양이 조선 8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지리적 위치가 치우침이 없이 적합하다는 뜻이다.

   물론 이 시대의 한양은 강북의 4대문(흥인문, 돈의문, 숭례문, 숙청문)안을 의미한다. 지금 서울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남산(南山)이 그때는 한양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자가 붙은 것이다. 북쪽의 구파발이니, 남쪽의 말죽거리니 하는 당시의 촌스런 지명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 보면, 이 동네들은 옛날에 한양 진입로에 위치한 톨게이트였음을 알 수 있다. 잠실은 뽕밭이었고, 정릉, 태릉, 선릉은 왕실의 무덤 자리였다.

   압구정동은 세조 때의 공신 한명회가 노년을 보내기 위해 한강 가에 지은 정자 압구정(狎鷗亭)’에서 따온 이름이다.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압구정에서 풍류를 즐기던 옛 선비들을 상상해 보는 것으로, 이 골치 아픈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잠시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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