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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집에 대하여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1.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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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집에 대하여

 

최용현(수필가)

 

   새마을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 방방곡곡에 확산되어가던 70년대 초반, 라디오나 TV 등에서는 새마을 운동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많이 방송되었다.

   줄거리를 보면 대개 한 젊은이가 주동이 되어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는데, 한 완고한 노인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하게 되지만 결국 그 노인을 설득하여 성공으로 이끌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새마을 운동을 반대하는 악역을 맡은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도 한결같이 최 노인이었는지.

   최 씨 성을 가진 사람이면 본관(本貫) 여하를 막론하고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최 씨 앉은자리엔 풀도 안 난다.’

   ‘최 씨에다 옥니이고 곱슬머리인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

   둘 다 최 씨는 지독한 사람이란 뜻이리라. 안강최라는 말도 있고 강뿔따구 최고집이란 말도 있다. ‘안강최는 고집 쪽의 대표 성씨일 테고, 후자는 강 씨는 불뚝성을 잘 내고 최 씨는 고집이 세다는 뜻이다.

   최 씨에 대한 이런 세평(世評)이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닐 터이니 이의 근원을 찾아내고 그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문제에 대해 소견을 피력해 볼까 한다.

   우선 최고집이란 말은 어떤 행태에 대한 구체적인 적시(摘示)가 아닌, 최 씨 성향에 대한 세평을 한 마디로 함축한 말이므로 이것은 그 근원의 규명이 불가능 한 것이다.

   다음으로 최 씨에다 옥니얘기는 옥니박이 곱슬머리와는 말도 하지 마라.’는 우리 속담에서 기인된 것으로, 옥니박이란 앞니가 안으로 굽게 난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곱슬머리는 문자 그대로 머리털이 곱슬곱슬한 사람을 말한다. 이 속담은 옥니와 곱슬머리를 가진 사람은 성질이 매섭고 깐깐하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인 바, ‘최 씨에다 옥니얘기는 이 속담과 최 씨의 독하고 고집스런 이미지를 다시 합성시킨 말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또 최 씨 앉은자리엔 풀도 안 난다.’는 속설은 그 근원이 최영 장군의 행적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 영 장군은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汝當見金如石)’는 노래가 있을 정도로 한 평생 재물을 초개(草芥)같이 여긴 고려 말의 명장이요 충신이다. 왜구와 홍건적을 무찔러 많은 전공을 세웠고, 그 후 지금의 국무총리격인 시중(侍中)이 되어서는 꺼져 가는 고려의 사직을 지키다가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일파에 의해 처형을 당하게 된다.

   그가 죽음에 임하면서 내가 생전에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일을 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는데, 그의 무덤에는 정말로 풀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의 무덤(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소재)은 오랫동안 붉은 무덤(赤墳墓)으로 불리어져 왔다. 수백 년이 지나 조선이 망하고 난 다음에야 후손들이 그의 무덤에 잔디를 입혔다고 한다.

   ‘최 씨 앉은자리에.’ 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된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최영 장군이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한 말이 곡해되어 독한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변모된 셈이다.

   최 영 장군 외에도 최 씨들 중에는 모난 행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당나라 과거에 급제, 눈부신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귀국하여 골품제의 모순타파, 능력위주의 인재등용 등 정치적 개혁을 주장하다가 좌절되자, 관직을 버리고 유랑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한 신라 말의 대 문장가이며 반골(反骨) 지식인이었던 최치원, 고려 무신 정권 때의 최후 승자로서 460년간 철저한 군부 독재정치를 하면서 몽고군의 침입에 끝까지 저항했던 최충헌과 그의 자손들.

   또, ‘일본과 수교를 하려거든 먼저 내 목을 쳐라.’며 도끼를 들고 격렬한 상소(侍斧上訴)를 올렸고, 정부가 단발령을 내렸을 때 내 목은 잘라도 머리는 못 자른다(頭可斷 髮不斷).’며 저항했고, 후일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다가 내 어이 원수의 밥을 먹고살겠느냐?’며 굶어 죽은 강골의 거유(巨儒) 최익현.

   현대에 와서도 그런 인물은 심심찮게 찾아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대항하다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외솔이라는 그의 호에서 드러나듯 오직 한글 연구에 한 평생을 받쳤던 한글학자 최현배.

   또 매년 연봉협상 때마다 구단으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했던 왕년의 프로야구 최고투수 최동원 부자(父子), 그리고 뒤늦게 저온살균우유를 파급시키면서, 신문의 광고지면을 까맣게 칠하며 뚝심하나로 전 우유업계를 상대로 고집스럽게 고군분투하던 파스퇴르유업의 창업주 최명재 회장도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아닌가 싶다.

   최 씨들의 이런 모난 행적들이 쌓여서 독하고, 고집이 세다. 반골이고, 외곬이다.’ 등 갖가지 편린(片鱗)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러한 것들이 모두 최고집이라는 말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필자 또한 고집이 세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다. 이에 대해 100% 수긍이 가지 않을 때도 있지만, 일단 타인에게 그렇게 보였다면 그 또한 자신의 일면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

   한 성씨의 후손들이 그 피의 인자(因子)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약한 것 같다. ()를 거듭할 때마다 이질적인 성씨의 피가 50%씩 유입되어 고유한 성씨의 피는 급격히 소멸되어 없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문의 독특한 환경, 가풍 등이 면면히 이어져 온 과정에서 후손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을 받을 수는 있으리라.

   ‘왕에게는 불굴의 정신이라고 불리는 것이 필부에게는 고집이라고 불린다.’

   영국 속담이다. 고집의 양면성을 잘 지적한 말이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다 일을 그르친 사람도 많지만, 고집 하나로 버티다가 끝내 뜻을 이룬 사람도 결코 적지는 않다. 문제는 고집 그 자체에 있지 않고 고집이 추구하는 방향의 타당성 여하에 있는 것이리라.

   마음속에 뿔이 생겨 아집에 빠질 정도가 아니라면, 고집도 개성의 한 형태로서 그만큼의 가치는 인정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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