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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땅이…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1.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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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땅이

 

최용현(수필가)

 

   우리나라 역사상 훌륭한 업적을 남긴 많은 위인들 중에서 가장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김유신 장군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는 어느 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이 이처럼 인기가 없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가 당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동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쳤기 때문이다.

   당시 고구려는 한반도의 북반부에서 북쪽으로는 송화강, 서쪽으로는 요하강에 이르는 광활한 만주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중원의 수와 당의 침략군을 여러 번 격퇴하였다. 수나라의 백만 대군을 지략으로 물리친 을지문덕과 당태종의 콧대를 꺾어놓은 안시성주 양만춘의 쾌거는 지금 생각하여도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신라가 당군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패망시키고 최초의 민족통일을 이룩하였을 때는 불행히도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얻은 땅보다 잃은 땅이 훨씬 더 많았으니 이걸 어찌 통일이라고 할 것인가.

   그 후 고구려의 유민이 힘을 합쳐 만주 땅에 세운 발해도 이백여 년 간 존속하다가 거란족에게 멸망하고 말았으니 그로부터 만주 땅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역사에 가정법을 쓰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만일 그때 고구려가 통일을 했더라면 저 광활한 만주 땅은 어쩌면 지금 우리 땅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 민족도 분명 약소국가 신세는 면했을 것이고, 고려나 조선조 때 몽고나 청나라, 왜구가 감히 우리 땅을 침범하지는 못했으리라. 그리고 만주 땅이 지금 우리의 영토가 되어있다면 수학여행이나 신혼여행 때는 고구려나 발해의 유적지에도 가보고, 또 연휴 때는 등산복을 입고 백두산에도 올라가볼 수 있지 않을까. 또 반도를 양분한 38선이나 휴전선 따위는 당초에 없었을 테니 북한의 핵문제 때문에 세계가 골치 아파하지 않아도 되리라.

   최근, 중국에서 3조원 이상을 투입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영역이었던 만주 땅, 즉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이른바 동북3성의 유물과 유적의 발굴 등을 수행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 5개년 계획이라는 대형국책사업을 통해 고구려를 자기네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면서 고구려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이들은 고구려가 국내성이 수도인 시기는 중국사, 평양천도 이후는 한국사에 포함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2001년 북한이 유네스코에 평양일대의 고구려 고분벽화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달라고 신청하자, 중국은 심사국의 자격으로 북한의 유적을 돌아보고 관리 소홀과 접근의 어려움을 들어 등재를 보류시키는 데 앞장을 섰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등을 정비하고 만주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보수 발굴하면서 자기네가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를 신청하는 엉큼한 행태를 보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옛 선조들의 활동무대였던 동북3성인 만주 땅, 우리 선조들의 이 땅 수복에 대한 역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보고자 한다.

   우리 민족이 만주 땅을 탈환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은 그 땅을 잃어버린 지 약 이백 오십 년 후이다. 통일신라가 분열을 시작하자, 철원에 태봉국을 세운 궁예는 옛 고구려 땅을 수복하려는 의지를 보이며 평양을 공략하는 등 북벌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폭정을 일삼다가 부하인 왕건에게 옥좌를 뺏기고 말았으니.

   그로부터 오백 년이 지난 뒤인 고려 말, 원나라가 차츰 쇠퇴해가고 새로 일어난 명나라가 차차 강성해 질 무렵, 원나라가 지배하고 있던 철령(함경남도 남부) 이북의 땅을 명나라가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키려 했을 때, 이에 분개한 친원파의 거두 최영은 요동을 무력으로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친명파인 이성계가 4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반대를 했으나 최영의 결심을 꺾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벌군의 총사령관이며 조정의 대들보였던 최영은 어리석은 우왕이 한사코 곁에 있기를 간청하는 바람에 원정에 참가하지 못했다. 이 일은 이성계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회군(回軍)을 단행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결국 최영은 이성계 일파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성계의 4불가론에 대한 당부(當否)는 지금도 사가들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만, 생각하건대 당시 중국은 원명(元明)왕조의 교체기였으므로 만주는 거의 무주공산(無主空山)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한 번 부딪쳐 보았더라면 어쩌면 만주를 탈환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무력으로라도 점령을 하고 나면 후일 외교교섭을 할 때 주도권을 행사할 수가 있었을 터이고.

   다시 만주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는 이백여 년이 지난 후에 찾아 왔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 태종의 침입을 받은 인조임금은 남한산성에서 항거 45일 만에 굴욕적인 항복을 했고, 그 결과 형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청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봉림대군은 형이 죽으면서 즉위(효종)하자 북벌계획을 세우고 의욕적으로 군사를 조련했다. 그러나 실현을 앞두고 갑자기 승하(昇遐)하는 바람에 그 계획은 다시 불발탄이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삼백 년이 지난 금세기에 만주 땅을 탈환할 수 있는 실낱같은 기회가 또 한 번 있었다.

   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 때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키고 북으로 진군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드디어 압록강까지 다다랐다. 그러나 통일을 눈앞에 둔 시점에 중공군 수십만 명이 압록강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이에 유엔군의 총사령관이던 맥아더 장군은 만주를 폭격하는 강경전략을 미국정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이 요청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비화를 우려한 당시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 의해 거부되었고, 끝까지 강경한 소신을 굽히지 않던 맥아더 사령관은 해임되고 말았다. 그 후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남북통일의 꿈과 만주탈환의 실오라기만한 희망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으니 언젠가는 또다시 기회가 올 것이다. 언젠가 찾아올 그 날을 위해, 까마득히 오래 전에 우리의 선조들이 만주벌판에서 말달리며 호연지기를 키웠다는 사실을 우리 후손에게 꼭 알려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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