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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 안에서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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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 안에서

 

최용현(수필가)

 

   나는 서울에서 살아가기에는 부적합한 사람인 모양이다. 남들 따라 자가용 한 대 뽑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서울거리 출퇴근길에 나선 지 일 년도 채 안되어 운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고 있다.

   차는 아파트 앞마당에 세워 놓은 지 벌써 수년이다. 주말에 어디 갈 때나 간간이 시동을 걸어 볼 뿐, 아예 운행을 포기하고 비싼 보험료랑 자동차세만 꼬박꼬박 물고 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 할 때보다 거의 한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야 하고, 북새통 같은 도로에서 시달리는 것이 지긋지긋했었다. 한 마디로 서울거리에서 차를 운전하는 게 싫었다.

   그러나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때는 자가용을 타고 귀성길에 오른다. 적게는 여덟 시간, 많게는 열 네 시간까지 걸려서 간 적이 있는 귀성길, 예전에는 기차표를 못 사서 못 간다고 핑계라도 댈 수 있었지만, 며칠씩 공휴일로 정해 놓은 요즘에는 핑계거리도 없어져 버렸다. 불효막심한 놈, 조상도 모르는 놈으로 낙인찍힐 각오가 되어 있으면 몰라도.

   명절 때 고향에 가려면 준비할 게 많다. 김밥 싸고 보리차에다 또 카세트테이프 서너 개를 새로 사서 앞뒤로 몇 번씩 돌려서 신물이 나도록 들어야 한다. 교통방송이나 FM음악프로 등 라디오를 제대로 들어보는 때도 이 때이다.

   나는 생방송을 좋아한다. 생방송은 미리 정해진 각본이 없다는 점에서 내용이 진솔하고, 때로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아슬아슬한 스릴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얼마 전 고향에 갔다가 새벽에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장면 하나를 소개해 본다. 아침에 이동 중계차를 몰고 다니면서 그곳의 교통상황을 알려주고 또 특수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만나서 인터뷰한 내용을 생방송으로 들려주는 프로에서다.

   십 수 년 간 매일 아침 길거리에서 꽃을 팔아온 한 아주머니와의 인터뷰가 나오고 있었는데 여자 아나운서가 그 아주머니에게 꽃을 파는 소감을 물었다. ‘십여 년간을 한 결 같이 매일 꽃과 함께 살아왔으니 더없이 행복하다. 보람을 느낀다.’ 이쯤의 답변을 기대했을까? 그러나 그 아주머니의 답변은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다.

   “어이구 못할 짓이에요, 매일같이 새벽에 일어나 꽃 가지러 가는 것이 지긋지긋해요. 내년 봄에 우리 큰아들이 군에서 제대하면 이 짓(?)도 그만둘까 해요.”

   꽃 파는데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붙이려는 의도 그 자체가 잘못이었을까? 그 여자 아나운서의 당황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나 혼자 킥킥거렸었다.

   시내에서 가끔 택시를 타는 경우가 있는데, 택시 안에서 방송이나 신문에 나지 않은 세상 얘기를 듣는 경우가 더러 있다. 택시운전기사는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택시는 일종의 사랑방이고 운전기사는 사랑방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 고약한 시절엔 택시를 타면 입 조심을 해야 했지만 요즘엔 맘 놓고 얘기해도 잡아가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며칠 전, 저녁 약속이 있어 퇴근길에 여의도에 가려고 택시를 탔다. 뒷좌석이 비어있어서인지 운전기사는 합승손님을 태우려고 여러 번 정차를 했다. 그러나 손님마다 도무지 방향이 맞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투덜거렸다.

   “에이, 오늘은 영 안 되는구먼. 두 모녀가 스타일을 구겨 놓더니만 하루 종일 재수가 없구먼.”

   “두 모녀가 어쨌는데요?”

   내가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운전기사의 얘기는 이러했다.

   오늘 오후에 교대한 후, 첫 손님을 못 만나서 한참을 공친 끝에 목동 아파트 부근에서 OO백화점에 가는 두 여자를 첫 손님으로 태웠다고 한다. 사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엄마와 고등학교 1, 2학년쯤 되어 보이는 딸이었는데, 대화로 미루어 보아 딸에게 옷을 사 주러 가는 것 같았다고 한다.

   딸이 용돈얘기를 꺼내더란다. 그 딸의 한 달 용돈이 30만 원인데 너무 적다고 10만 원 더 올려달라고 하더란다. 그 돈으로 쓸 것이 없단다. 엄마는 지금은 올려줄 수 없다며, 대학에 들어가면 올려주겠다고 하고.

   모녀가 한참을 티격태격하는 것을 듣고 있으려니 슬그머니 화가 나더란다. 고등학생의 한 달 용돈이 30만 원이 적다고 하니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더란다. 자기 딸은 한 달에 3만 원도 못 주는데.

   일할 맛이 나지 않더란다. 그래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나는 당신 같은 손님들은 태우고 싶지 않다며 내리라고 했단다. 한참 승강이 끝에 결국 차비도 받지 못하고 중간에서 하차시켰다고 한다.

   차가 여의도에 진입하려고 대방역 지하차도에 들어서려는 순간, 초등학교 4, 5학년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 하나가 손을 들었다. 그 옆에 차가 섰다. 그 꼬마, 앞 창문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여의도 OO아파트 따불!”

   차에 태웠다. 애들은 계산이 정확하다며 요금기를 꺾겠다고 운전기사가 내게 양해를 구했다. 운전기사가 웃으며 꼬마에게 물었다.

   “누가 따불이라고 가르쳐 줬니?”

   “엄마가 그랬어요. 그렇게 해야 택시를 빨리 잡을 수 있다고 했어요.”

   “집에 차가 없니?”

   운전기사가 다시 물었다.

   “아뇨, 두 대 있어요. 아빠 차는 회사로 갔고요. 나는 엄마차를 타고 매일 학원에 왔다갔다했는데, 오늘은 엄마가 볼 일이 있다면서 택시를 타라고 했어요.”

   운전기사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 꼬마의 목적지에 왔다. 2,400원이 나왔다. 그 애가 5,000원을 운전기사에게 내밀었다. 운전기사는 갈등을 느끼는 듯 천 원 짜리를 쥐고 동전을 꺼내고 있는데 그 꼬마가 뒷문을 열면서 말했다.

   “잔돈은 팁이예요.”

   어른들이 돈에 약하다는 것을 아이들이 너무 잘 간파하고 있다. 자녀들에게 교과서에 씌어져 있는 대로 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막상 자녀들이 그렇게 하면 왜 이리 멍청하냐고 꾸짖기 일쑤다. 아이들은 교과서의 가르침과 실제 현실 사이에서 수없이 갈등을 느끼면서 서서히 오염되어 간다.

   걱정스럽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될 때쯤은 어떤 세상이 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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