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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 오면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1.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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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 오면

 

최용현(수필가)

 

   가을이 오는 문턱에서, 오랜만에 책상서랍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빛바랜 편지 한 통이 한동안 나를 아련한 추억에 잠겨있게 했다. 9월이 오면 가끔 떠오르는 한 여자와 편지, 그 편지에 얽힌 사연을 소개 하고자 한다.

   북한군의 8.18 도끼만행이 있었던 그 해, 1976년의 늦여름은 군인에게는 잔인했던 시절 이었다. 그 때 군대생활을 했던 사람은 기억하고 있으리라. 전군(全軍)에 비상이 걸려 전방에서는 전쟁직전의 대기상태였고, 서울 가까이에 있는 우리 부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휴가와 외출, 외박이 금지되었다. 이미 휴가를 가 있던 군인들 중에서 휴가를 반납하고 자진 귀대한 사병들이 늘어나, 그 미담이 전우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전군이 연일 단독군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고, 심지어 식사 때도 총을 옆에 끼고 있어야 했다.

   당시 육군 상병으로, 사단의 암호병으로 복무하고 있던 나는 매일 24시간 암호실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하루 종일 꼼짝없이 좁은 골방(?)에 갇혀 있던 터라 무언가 읽을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때 샘터9월호가 우송되어 왔으니 아마도 8월 말쯤이었나 보다. 거기에 어느 여름날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서울에 사는 한 여자의 글이 실려 있었다.

   어느 날, 피서지에서 친구가 보낸 엽서를 받고 마음이 울적해졌다. 한 여름 무더위에도 바캉스를 떠나지 못한 처지, 대학에 합격했으나 가정형편 때문에 진학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 등을 쓰고, 혼자 고궁을 찾아가 걸으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다는 내용이었다.

   대학에 합격하고도 진학을 못했다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나는 그 소녀에게 편지를 썼다. 뭐라고 썼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일주일쯤 뒤 답장이 왔다. 정성 들여 또박또박 쓴 예쁜 글씨였다.

 

                   보내주신 편지, 감사했습니다.

                   하루를 접고 조용히 상념에 젖어보는 시간입니다.

                    하루 20여 통씩 오는 편지들 속에서 조금은 자신이 역겹게 춤춰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웃으며 편지를 쓰고 싶었고, 나는 갑자기 꿈꾸는 소녀가 되고 싶었습니다.

                   한 번쯤, 아니 언제까지나 그 고운 사랑을 먹고 싶어서 나는 소녀이고 싶었습니다.

                   오늘 같은 날은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습니다.

                                                     …… (중략) ……

                   음악이 있고 그 속에 내가 찾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많은 얘기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군복무 충실히 하시구요.

                   뜨겁게 뜨겁게 열심히 사세요.

                   도박, 어쩌면 도박일지도 모르지만 잠시 나는 소녀이고 싶습니다.

                   외출하시면 연락하세요.

                                                                                            서울 종로구 중학동에서 경아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소녀에게서 전화번호까지 적혀있는 답장을 받아든 기분. 비상 상황이라 외출을 못하지만, 우리 부대는 서울과 인접해 있어서 작전처에 있는 상황실에서는 시내전화가 가능했다. 나는 며칠 뒤 당직 장교가 저녁 식사하러 간 사이에 상황실에서 전화를 걸었다.

   서울 가까이, 시내전화를 할 수 있는 데서 근무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상기된 목소리에 수줍음이 담겨져 있었다. 나는 북한군의 도끼만행 때문에 외출이 금지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부대로 한 번 와달라고 했다.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면회를 왔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9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면회실에 들어서자 흰 블라우스를 입은 한 여자가 혼자 앉아있었다. 나는 목례를 하고 마주 앉으면서 철모를 벗어 탁자 위에 놓았다. 긴 머리를 뒤로 넘겨서 묶고, 엷게 화장을 한 모습이었다. 가녀린 얼굴 위에 이지적인 눈이 빛나고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차분한 느낌을 주는 인상이었다.

   그 자리에서 서너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그 글이 실리고부터 하루에 이삼십 통씩 편지가 왔는데, 어제까지 6백 통 정도를 받았다고 했다. 대부분 군인이고, 중동에 간 산업역군이나 미국, 캐나다의 교포한테서도 온다고 했다. 매일 저녁, 3남매가 모여서 편지를 심사하는데, 내 편지가 장원(?)으로 뽑혔다고 했다. 나더러 본격적으로 글을 써보라고 했다.

   충남 공주가 고향이고 고려대학교 3학년인 남동생과 무학여고 3학년인 여동생과 함께 자취하고 있다고 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와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3년 전에 남동생과 동시에 대학에 합격했는데, 자신은 진학을 포기했단다. 부친이 고향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둘을 한꺼번에 사립대학에 보낼 만큼 형편이 넉넉하지는 못하다고 했다.

   지금은 직장을 그만두고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고 있는데, 금년 들어 부모님들이 자신의 결혼을 서두르고 있다고 했다. 스물네 살이란다.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았다. 내 나이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서 좀 놀라는 것 같았다.

   첫눈이 올 때쯤 다시 오겠다는 말과 함께 핸드백에서 책 한 권을 꺼내서 내밀었다. 문예문고에서 나온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란 책이었다. 일본의 한 젊은 철학도(倉田百三)의 사랑, , 이별, 고독, 자아, 인식, () 등의 소주제에 대한 성찰이 기술되어 있었다. 그 책은 내 젊은 시절에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책이 되었다.

   그 후, 첫눈이 올 때쯤 다시 편지가 왔다. 고향에 내려와 있어서 면회를 갈 수 없다며, 부모가 권해서 선을 본 남자가 있는데 결혼을 채근하고 있다고.

   다음해 봄, 그녀의 여동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청첩장과 함께. 언니의 간절한 부탁이라며,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리니까 꼭 와서 축복해달라고 했다. 나는 부대 안에서 그녀의 행복을 기원해 주었고, 그녀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9월이 오면 경아라는 이름의 그 여인이 생각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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