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시 계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1. 19:59

본문


시 계

 

최용현(수필가)

 

   군에서 제대를 하고 대학 2학년에 복학해서 다시 하숙생활을 시작하던 때이다. 그때 만난 룸메이트가 시계같이 정확하고 빈틈없는 친구였다. 방안에 머리카락 하나만 보여도 손으로 주웠고 바지를 빨면 뒤집어서 빨랫줄에 널만큼 깔끔한 친구였다. 적당히 어질러놓아야 마음이 편하고, 빨래거리는 비눗물에 지근지근 밟아서 헹구는 둥 마는 둥 대충 말려서 입던 나하고는 아예 근본부터 달랐다.

   다른 것은 약간씩 서로 절충해서 조화시켜 나갈 수 있었는데 기상시간이 문제였다. 그는 무슨 보물단지처럼 자명종 시계를 하나 갖고 있었는데, 그 괴물을 새벽 5시에 맞춰 놓고 밤 10시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그 자명종 시계는 요즘 것처럼 경쾌한 음악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닌, 꼭 양철통 두드리는 소리처럼 찌리리릭~ 하고 울려대는 시계였다. 그는 늘 새벽 5시에 일어나 무슨 운동인가를 하러 나가고 7시쯤 되어야 들어왔다.

   밤늦게까지 공부한답시고 빈둥거리고 있다가 12시가 넘어야 잠자리에 들고, 아침 밥상이 들어와야 죽을상을 하고 일어나는 올빼미 체질인 나와는 죽이 맞을 리 없었다.

   그 놈의 시계는 새벽 5시만 되면 어김없이 괴성을 질러댔다. 어휴! 저승사자가 부르는 소리가 저럴까, 저 소름 끼치는 소리.

   저 웬수가 새벽 5시에 요란한 소리를 낼 것이라 생각하면 나는 자리에 누울 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그때부터 불면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그도 역시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으리라.

   몇 달인가를 서로 악전고투하다 우린 결국 이혼(?)하기로 합의했고, 다행히도 옆방에 역시 비슷한 이유로 궁합이 잘 맞지 않던 친구와 파트너를 바꾸었다. 그날부터 옆방에서는 둘 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운동을 나갔고, 우리 방에서는 둘 다 아침밥상이 들어 올 때까지 잠을 잤다.

   그때부터 자명종은 내게 공포의 존재가 되었고, 그 자명종 노이로제를 떨치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집밖을 나설 때면 언제나 시계를 차지만 집에 들어오면 시계부터 벗어 놓는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기(利器) 중에서 시계보다 더 인간을 구속하는 것은 없는 듯싶다.

   나는 시계 없이는 단 하루를 살아가기도 힘겨울 것 같다. 월급쟁이의 제일의(第一義)인 출근시간 지키는 것부터 벽에 부딪칠 것 같다. 아직도 밤늦게까지 빈둥거리다가 12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드는 버릇이 있는 데다, 아침에 일어날 때는 눈이 떨어지지 않아 1분만 더, 1분만 더 하면서 출근 준비시간 마지노선까지 누워있는 병벽(病癖)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만 해도 큼지막한 벽시계가 대청마루에 걸려있는 집은 틀림없이 부잣집이고 행세깨나 하는 집이었다. 그만큼 시계가 귀했다. 요즘은 한 집에 시계가 여남은 개, 적어도 대여섯 개쯤은 되리라. 방마다 시계가 있고, 유치원 아이들까지 만화가 그려진 시계를 차고 다니는 세상이니까.

   중학교 2학년 때, 일등 하면 시계를 사 주시겠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혹하여 불철주야(?) 열심히 공부를 한 결과, 몇 달 만에 난생처음 내 시계를 가진 이래, 지금까지 여러 시계가 내 손목을 거쳐서 사라져 갔다. 뒤 뚜껑을 열어 부속을 건드려서 망가뜨린 시계, 해수욕장에서 물이 들어 못쓰게 된 시계, 훈련소에서 각개전투 하다 옆 전우의 개머리판에 부딪쳐 박살난 시계, 지하철 안에서 잃어버린 시계.

   늘 아버지가 사 주시거나 형에게서 물려받은 시계를 차던 내게, 내 시계를 직접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은 대학 3학년 겨울방학 때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되면서였다.

   예물 준비 때문에 시계 점에 갔다. 신부 측에서는 신부, 장모님, 그쪽 고모님이 나왔고 신랑 측에서는 신랑(?), 어머니, 이모님이 함께 갔다. 진열장에 있는 수많은 시계 중에서 맘대로 하나를 고르라는 거였다. 휘황찬란한 그 진열장을 둘러보는데, 평소에 갖고 싶었던 시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시계를 주인이 꺼내 주었다.

   “이만오천 원입니다.”

   시계 점 주인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 등 뒤에서 이모님의 벼락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야 이놈아! 장가가는 놈이 전자시계가 뭐냐, 벌써부터 처가 집 봐 주는 거냐?”

   본래 대가 센 이모님이었다. 서슬 퍼런 그 말에 내 손은 다시 오그라지고 말았다. 전자시계가 갖고 싶었는데.

   눈치 빠른 주인이 얼른 다른 쪽으로 안내했다.

   “이건 오메가 22만원이고, 이건 로렉스 25만원, 이건 로렉스 금딱지 30만원.

   나는 더 듣는 것을 포기하고 그 중 가장 싼 오메가를 잡았다. 별로 맘에 들지도 않았는데, 처가 집 봐 준다는 말에 찍 소리도 못하고.

   그런데, 그것이 가끔씩 신문에 나는 홍콩제 가짜였는지 몇 년 안 되어 고장이 나고 말았다. 시계 점에 갔더니 외제는 맞는 부속품이 없어서 고칠 수가 없다는 거였다.

   드디어 나는 꿈에도 그리던 전자시계를 평생 처음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새로 산 전자시계를 몇 년 끼고 다니다가 이번에는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잃어버렸다.

   다시 바늘과 숫자가 함께 나오는 전자시계를 샀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절묘한 조화일까, 초침과 숫자가 어찌 이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함께 나아갈 수 있는지 볼수록 신기하다.

   만물이 잠든 깊은 밤, PC 앞에 앉아 글귀와 씨름하고 있노라면 벽시계의 째깍거림이 유난하다. 책상 위 전자시계의 숫자판 움직임이 최면처럼 다가온다. 영원과 맞서는 듯 끝없는 의문과 절망에 부딪친다. 무엇이 이 지구를, 이 우주를 이토록 질서 정연하게 조율하고 있는 것일까?

   신의 섭리인가, 자연의 철칙인가? 어쩌면 모두 다 잠든 밤에도 혼자 째깍거리며 움직이는 저 시간, 저 시계의 조화가 아닐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도 하나의 시계가 아닐까? 태양을 향해 시침처럼 천천히 공전을 하고, 분침처럼 분주히 자전을 하는. 그리고 우리 인간은 지구라는 시계를 구성하고 있는 조그만 톱니바퀴의 한 부분이 아닐는지.*


'에세이 및 콩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 지하철  (0) 2018.12.21
9월이 오면  (0) 2018.12.21
승용차 안에서  (0) 2018.12.21
어느 눈 오는 날에  (0) 2018.12.21
얼굴  (0) 2018.12.21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