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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삽화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1.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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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삽화

 

최용현(수필가)

 

                    그가 왔다

                    밤하늘의 찬란한 별들을 거느리고

                    어깨에 척 양복 윗도리를 걸친 채

                    비스듬히 담배를 꼬나문 그가

                    현관에 들어서며

                    그는 노래를 부른다

                    만나면 괴로오워

                    괴로워서 우울었지

                    그 새끼가 말이야

                    그 새끼가 억

                    괜히 만나자고 억

                    그는 냉수를 벌컥벌컥 마신다

                    그리고 정확하게 침대로 가서 쓰러진다

                    여보, 이리와 봐

                    그는 소리를 지른다

                    간격을 두고 세 번을 부르고

                    조용해진다

                    새벽 두 시

                    그녀는 대여기일이 지난 비디오테이프를 보다 말고

                    마루에서 잠이 든다

                    지금부터

                    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

                    밤은 될 수 있는 한

                    조용조용 지나간다

 

   평범한 소시민이면 누구나 한두 번쯤 겪었을 법한 정경을 기막히게 형상화 해 놓은 우영창의 시 오래된 평화입니다. 우리네 삶은 이처럼 모두 고만고만하게 조금씩 고달프고, 그래서 인생은 살아볼 만한 건지도 모릅니다.

   한 해가 시작되는가 싶더니 어느새 봄이 무르익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세월은 흐르고 그만큼 종점을 향해 한 발짝 더 다가간 것 같습니다. 세월의 살()은 되돌려질 수 없는 것이지만 가끔씩 한 발 물러서서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겠지요.

   내 젊은 날의 삽화(揷畵) 하나를 떠올려 봅니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복학해서 학교에 다니던 때였으니 20년 전의 일입니다. 학교 앞 우리 하숙집 옆에 보영이라는 다섯 살쯤 되는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내가 한 눈에 반할 정도였으니 상당히 예뻤지요. 미미인형처럼 눈이 유난히도 커서 그 애의 얼굴은 온통 눈뿐이었습니다. 머리는 한 갈래 아니면 두 갈래로 늘 예쁘게 묶어져 있었습니다.

   그 애는 제 또래가 없어서인지 초등학교에 다니는 언니들과 함께 어울려 집 앞 골목에 서 놀고 있었는데, 언니들이 잘 끼워주지 않았던 듯 했습니다. 나는 학교 가는 길이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초콜릿을 사다가 다른 애들 몰래 주기도 하고 100원 짜리 동전을 쥐어 주기도 했습니다.

   그 대가(?)로 묶은 머리를 살짝 당겨보기도 하고 뺨을 살짝 꼬집어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번쩍 안아서 담 벽의 쓰레기통 위에 올려놓고 그냥 가기도 했습니다. 험상궂게 생긴 얼굴에다 며칠씩 수염을 깎지 않던 때이라 요즘 같았으면 영락없이 어린이 유괴범으로 몰렸을 것입니다. 그땐 그래도 세상이 요즘처럼 그렇게 삭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애는 나를 보면 도망치는 시늉을 했지만 도망치지는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학교 갔다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 골목에서 아이들이 빙 둘러앉아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고 보영이도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보영이의 머리만 당겨보고 그냥 지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때입니다. 둘러앉아 있던 언니들 중에서 초등학교 4, 5학년쯤 되는 아이 하나가 불쑥 내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보영이가 크면 보영이랑 결혼 할 거예요?”

   나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고 말문이 막혔습니다. 얼른 하숙집으로 도망쳐 들어왔습니다. 나는 보영이를 잊기로 했습니다. 그 후론 골목길에서 보아도 외면했습니다. 우린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지난 연말에 볼일이 있어서 그곳에 갔다가 그 집 앞을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골목길을 서성이다가 마침 그 집에서 나오는 보영이를 보았습니다. 숙녀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젠 도저히 머리를 당겨 볼 수도, 번쩍 안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 숙녀는 내가 들려준 얘기를 듣고는 살포시 웃을 뿐 그 옛날을 기억해 내지는 못했습니다. 세월의 횡포에 참으로 기가 막혔습니다. 그렇습니다. 20년이란 세월은 능히 어린아이를 숙녀로 만들어 놓고, 숙녀를 중년부인으로 만들어 놓을 만한 시간입니다. 엄연한 현실인데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올해는 뜨겁게 살고 싶습니다. 더욱 날카롭게 빛나고 싶습니다. 시 하나를 찾아냅니다. 보영이와 만나던 시절, 해가 바뀔 무렵 어떤 소녀가 예쁜 글씨로 곱게 적어서 보내온 시입니다. 지극히 평범한 언어를 통해 따끔한 경구(警句)를 구사한 시, 깔끔하고 고독한 독신생활을 해오다 간 여류시인 노천명의 별을 쳐다보며입니다. 더도 덜도 말고 올해는 이 시처럼 살아 봤으면 합니다.

 

                  나무가 항시 하늘로 향하듯이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친구보다

                  좀 더 높은 자리에 있어 본댔자

                  명예가 남보다 뛰어나 본댔자

                  또 미운 놈을 혼내주어 본다는 일

                  그까짓 것이 다 무엇입니까.

 

                  술 한 잔만도 못한

                  대수롭잖은 일들입니다

                  발은 땅을 딛고도 우리

                  별을 쳐다보며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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