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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의 호구(虎口) 부자 ‘조진과 조상’

삼국지 인물열전

by 월산처사, 따오기 2020. 4. 18.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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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의 호구(虎口) 부자조진과 조상

 

최용현(수필가)

 

   조진과 조상 부자(父子)는 조조와 같은 패국 초현 출신으로 둘 다 위의 대장군을 지낸 무장이다. 위 황제 조예와 조방 재위 때 돋보이는 활약을 했던 두 사람의 행적을 당시의 최고 실력자인 사마의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보고자 한다.

   조진(曹眞), 자는 자단(子丹). 위 황제 조비 때부터 무장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조비의 임종 때, 조진은 사마의와 진군, 조휴 등과 함께 유조(遺詔)를 받은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태자 조예를 제위에 올리고 그해 대장군의 지위에 오른다.

   촉의 제갈량이 대군을 이끌고 위의 국경을 침범해왔을 때, 위 황제 조예는 출전을 자원한 부마(駙馬) 하후무에게 대도독의 인수를 주며 촉군을 막게 했다. 그러나 하후무는 천수군의 젊은 준재(俊才) 강유를 제갈량에게 투항하게 하더니, 옹주의 서쪽지역인 천수 기성 상규를 촉군에게 빼앗기고 강족(羌族) 땅으로 달아나버렸다.

   이에 위 황제는 대장군 조진을 출전시켰다. 서전에서 군사(軍師) 왕랑이 제갈량의 통렬한 질타를 받고 말에서 떨어져 죽자, 위군은 급격히 사기가 떨어져 패퇴했다. 조진은 다시 강족의 월길 원수가 이끄는 15만 군사를 끌어들여 공격하였으나 또 제갈량에게 패했다. 제갈량이 진창으로 쳐들어오자, 조진은 용장 왕쌍을 선봉장으로 출전시키며 분전했으나 제갈량과 강유의 계책에 걸려들어 또다시 패퇴했다.

   위 황제 조예는 40만 대군을 일으켜 조진을 대도독, 사마의를 부도독, 모사 유엽을 군사로 하여 촉의 한중으로 출진(出陣)시켰다. 그러나 오랜 가을장마 때문에 대군을 움직이기가 어려워 퇴각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사마의는 촉군이 기산을 뺏으러 올 것으로 예상하고 퇴각할 때 군사를 둘로 나누어 기곡과 야곡을 지키자고 했으나, 조진은 장마로 인해 잔도(棧道)가 끊어졌기 때문에 촉군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결국 내기를 했다. 촉군이 오지 않으면 사마의가 분 바르고 연지 찍고 치마저고리를 입고 조진이 시키는 대로 하는 벌칙을 받고, 촉군이 오면 조진이 황제에게서 하사받은 말과 옥대를 사마의에게 주기로 했다. 사마의는 장난스럽게 벌칙을 제시했으나, 조진은 적장 제갈량을 막는 것보다 부장인 사마의에게 지지 않으려고 더 신경을 썼다.

   이때 촉군은 사마의가 예측한 대로 장안으로 가는 요지인 기산을 취하기 위해 군사를 둘로 나누어 기곡과 야곡으로 쳐들어왔다. 촉군이 오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던 조진은 야곡에 주둔해 있다가 촉군의 기습을 받아 거의 죽을 뻔 했으나, 때마침 구원군을 이끌고 온 사마의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조진은 자신의 지략이 사마의에게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운 나머지 화병으로 드러눕고 말았다. 이때 제갈량은 위군 포로를 돌려보내며 그대는 천문과 지리, 일기, 병법도 모르는 아주 무식한 장수이니, 후일 사관(史官)들이 그대를 달아나기에 바쁜 졸장부로 기록할 것이라고 조롱하는 서신을 조진에게 전하게 한. 조진은 그 편지를 읽다가 울화통이 터져 숨지고 만다.

   연의에서는 조진이 사마의와 내기를 했다가 져서 놀림을 받았고, 적장 제갈량에게 연전연패하다가 수모를 당해 죽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조진이 제갈량의 북벌을 잘 막아낸 덕장이며, 그의 군공(軍功)은 모두 사마의가 가져간 것으로 되어있다. 또 조진은 제갈량의 서신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고, 병이 나서 낙양의 집으로 돌아가서 죽었다고 한다.

   조상(曹爽), 자는 소백(昭伯). 조진의 큰아들이다. 술과 여색에 곯아 병석에 누운 위 황제 조예는 대장군 조상과 태위(太尉) 사마의를 불러 태자 조방을 잘 보좌하라는 유조를 남기고 36세에 죽었다. 여덟 살 조방이 제위에 오르자, 황족인 조상은 껄끄러운 사마의를 태부(太傅)로 직위를 높여주면서 그의 병권을 뺏고 대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도 나가지 않고 두 아들과 함께 낙향하여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조상은 황제 부럽지 않은 호사(豪奢)부귀영화를 누리면서, 그래도 사마의의 존재가 부담스러운지 형주자사를 맡게 된 이승에게 하직(下直)인사 겸 사마의의 근황을 살펴보게 했다.

   이런 상황을 눈치 챈 사마의는 머리를 풀어헤친 채 부축을 받으며 이승을 맞았다. 사마의는 말을 잘 못 알아듣는 척 엉뚱한 소리를 하며 연신 기침을 쿨룩쿨룩 하다가 시녀가 주는 탕약을 마시면서 질질 흘리다가 쓰러졌다. 이승이 돌아가서 얼마 못살 것 같다.’고 전하자, 조상은 그 늙은이가 죽는다면 내게 무슨 걱정이 있으랴!’ 하며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며칠 후, 조상이 황제를 모시고 조예의 묘인 고평릉에 성묘 겸 사냥을 떠나자, 사마의는 드디어 두 아들과 심복 장수, 그를 따르는 군사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궁궐을 점령하고 궁중의 어른인 곽 태후를 포섭했다. 다시 도성인 낙양을 장악한 사마의는 황제를 모시고 있는 조상에게 사자를 보내 병권만 내놓으면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조상의 부하들은 우리가 황제를 모시고 있으니 황명(皇命)으로 가까운 허도의 군사를 동원하여 맞붙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며 싸울 것을 권했다. 그러나 조상은 사마의가 죽이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병부의 인수(印綬)를 사마의에게 보낸다. 결국 대권을 장악한 사마의에 의해 조상과 그의 두 동생 및 삼족까지 모두 참수 당하고 만다.

   조조의 손자인 조예의 죽음은 위의 몰락을 예고하는 신호였다. 조예가 양자로 들인 태자 조방은 겨우 8세에 황제가 되었고, 고명대신 두 사람 중 황실을 보호해야할 책무를 지닌 조상은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老獪)한 사마의의 적수가 되지 못했으니, 조조가 세운 위는 이때부터 망조(亡兆)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 조진은 촉 제갈량의 침공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으나 지략에서 사마의에게 뒤져 곤욕을 치렀다. 아들 조상은 아버지 덕에 금수저로 살다가 한때 사마의의 병권을 뺏으며 대권을 잡았으나, 사마의 부자를 죽이지 않고 방심했다가 역습을 당해 멸문(滅門)의 화를 입고 말았다. 부자 둘 다 사마의에겐 호구(虎口)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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