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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사후의 군권 인수자 ‘양의’

삼국지 인물열전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9. 4. 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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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 사후의 군권 인수자 양의

 

최용현(수필가)

 

   소설 삼국지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는 184년부터 시작하여 오가 멸망하여 삼국이 통일되는 280년까지 97년간의 이야기이다. 제갈량이 사망하는 234년은 삼국지가 시작된 지 50년이 지났고, 삼국 통일까지는 46년이 남아있는 시점으로 거의 중간 지점이다. 소설 삼국지 10권을 놓고 보자면 6권 초쯤에 해당된다.

   그런데 소설 삼국지는 10권 중에서 9권 말이나 10권 초에 제갈량이 사망하는데, 그러면 바로 마무리 수순에 들어간다. 위의 사마의와 그의 자손들의 부상(浮上)과 찬탈, 오의 손권 사후의 권력쟁탈, 촉의 강유의 북벌, 그리고 촉과 오의 멸망사와 위를 이은 진의 통일이 남아있는데, 이들 이야기는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소설 삼국지는 시간의 불균형이라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은 90% 이상이 제갈량이 사망하기 전의 인물이고 제갈량 사후에 부각되는 인물은 채 10%도 되지 않는다. 10%의 인물들은 삼국지의 말미에 등장했다는 이유로 삼국지마니아뿐 아니라 사가들에게서조차 홀대를 받고 있다.

   그런 인물들을 찾아보면, 위에는 사마사와 사마소, 조진과 조상, 하후무와 하후패, 종회와 등애, 양호, 두예와 왕준 등이 있다. 또 오에는 제갈각, 손준과 손침, 정봉, 육항 등이 있고, 촉에는 등지와 진복, 장완과 비의, 양의, 강유, 황호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제갈량이 죽을 때 위연을 제치고 군권을 물려받은 양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양의는 자가 위공(威公)이고 제갈량의 북벌 때 수행하면서 장사(長史) 겸 수군장군(綏軍將軍)을 맡았다. 기획과 용병에 재능이 뛰어나 야전에서 직접 적과 싸우기보다는 제갈량의 참모 역할을 주로 했다. 촉의 북벌군이 재차 한중으로 들어갈 때 양의는 제갈량에게 이런 건의를 했다.

   “중원 정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니 군사를 두 반으로 나누어 반은 출정시키고 반은 대기했다가 석 달 후에 교대를 하면 어떨는지요? 그렇게 하면 군사들이 지치지 않고 늘 사기충천한 상태에서 중원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갈량은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바로 채택했다. 촉군들은 1백일씩 전방과 후방을 오가며 교대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병사들의 사기도 높아졌고, 전방으로 군량을 수송하는 일도 반으로 줄어들었다. 양의의 참모로서의 재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북벌에 나선 촉군 진영에는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다. 촉군 최고의 야전사령관 위연과 최고의 참모 양의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렸고, 심지어 제갈량 앞에서도 막말을 하며 다투었다. 제갈량은 반골기질의 위연을 처음부터 못마땅해 했고, 성격이 급하고 더러 편협함을 보이는 양의 또한 미덥지 않았으나 두 사람의 재능이 아까워서 애써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위군과 대치하던 중 오장원에서 과로로 쓰러진 제갈량은 자신의 수명이 다한 것을 알고 자신의 사후에 대비한 조치를 한다. 먼저 강유를 불러 자신이 평생 배우고 익힌 것을 24편으로 정리한 책과, 화살 10개씩을 한꺼번에 쏠 수 있는 연노(連弩) 제작법을 기록한 설계 도본을 물려준다.

   제갈량은 다시 양의를 불러 군권을 물려주고 자신이 죽은 후의 퇴군(退軍) 지침 등을 지시한 후, 위연이 반역할 것이라며 그에 대한 대책도 알려준다. 또 성도에서 온 사신이 후임 승상에 대해서 묻자 장완을, 그 다음에는 비의를 추천하고 가을바람 부는 오장원에서 숨을 거둔다. 54세였다.

   촉군은 발상도, 곡도 하지 말라는 공명의 유명(遺命)대로 양의의 지휘아래 질서정연하게 퇴군했다. 이때 제갈량이 죽었다고 판단한 사마의의 군사들이 쳐들어오자 미리 만들어서 사륜거에 올려놓은 제갈량의 목상(木像)을 보여준다. 사마의를 비롯한 위군들은 제갈량이 아직 살아있는 줄 알고 혼비백산하여 달아난다.

   군권이 양의에게로 넘어간 것을 알게 된 위연은 분노하며 부장인 마대와 함께 성도로 돌아가는 제갈량의 운구행렬을 막아서지만, 제갈량에게 미리 지침을 받은 마대에 의해 목이 떨어지고 만다. 양의가 표문을 올려 그간의 경과를 자세히 보고하자, 후주는 위연의 죄는 크지만 그간의 공로를 생각해서 잘 장사지내주도록 하라.’고 분부한다.

   제갈량의 영구가 무사히 성도로 돌아오자 후주는 양의의 공을 치하하고, 문무백관들과 함께 상복차림으로 성 밖 20리 앞에까지 나와 영접했다. 그리고 아들 제갈첨으로 하여금 제갈량의 유지(遺志)대로 정군산에 안장토록 했다. 후주는 충무후라는 시호를 내리고 몸소 제를 지내면서 계절마다 제사를 올리도록 사당을 짓게 했다.

   제갈량의 유언대로 장완은 승상에, 비의는 상서령에 봉해졌고, 양의는 중군사(中軍師)에 임명되었다. 양의는 자신보다 공직경력도 짧고 세운 공도 적은 장완이 승상이 되고, 자신은 전방의 한직으로 밀려난 것이 못마땅했다. 비의가 찾아오자 양의는 그때 차라리 군사를 이끌고 위로 투항할 걸 그랬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늘어놓았다.

   이 말을 들은 비의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서 은밀히 후주에게 표를 올려 보고했다. 후주는 양의를 잡아들이고 참형에 처하려 했으나, 승상 장완이 나서서 양의의 죄는 크지만 지난날 승상을 따라다니며 많은 공을 세웠으니 죽이지 말고 외지로 내치소서.’ 하고 간했다. 후주는 장완의 말을 받아들여 한중으로 귀양 보내 평민으로 살게 했다.

   양의는 부끄러운 나머지 귀양 가는 도중에 스스로 목을 찔러 생을 마감한다. 양의가 자신의 벼슬이 낮다고 불평하며 위에 투항하겠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아서, 혹시 연의의 저자가 지어낸 얘기가 아닐까 싶어 확인해보니 정사에도 그대로 기록되어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건대, 제갈량은 자신의 사후에 군권을 맡길만한 인물로 양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한 강유는 너무 젊었고, 위연은 처음부터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선에서 함께 일하며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 양의는 잠시 군권을 맡길 만한 그릇은 되지만 승상이 될 만한 그릇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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