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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 형제에 맞선 무장 ‘관구검과 제갈탄’

삼국지 인물열전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9. 4. 10.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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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 형제에 맞선 무장 관구검과 제갈탄

 

최용현(수필가)

 

   삼국지의 최고실력자 조조는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놓고 자신의 뜻대로 제후들을 호령하였지만 끝내 제위를 찬탈하지는 않았다. 조조가 황제에 오르지 않은 것은 그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역사에 찬탈자로 기록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의 아들 조비가 후한 마지막 황제를 제위에서 끌어내리고 위 황제가 되지 않았는가.

   세월이 흘러 조조의 증손자 대에 이르자, 또 다시 위 조정에 막강한 실력자가 나타나 어린 허수아비 황제를 위협하며 제위를 찬탈하려는 야심을 드러낸다. 바로 사마의의 두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 형제이다. 사마 형제의 찬탈 시도에 반기를 들고 항거한 인물이 관구검과 제갈탄이다.

   관구검은 위의 무장으로 고구려와 접경지역인 유주자사를 맡고 있었다. 234년 요동태수 공손연이 스스로를 연왕이라 칭하고 15만 대군을 앞세워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군 사령관 사마의를 도와 반란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또 고구려를 침공하여 수도 환도성을 함락시켜 기공비(紀功碑)를 세웠고 패주하던 고구려 동천왕을 옥저까지 추격하기도 했다.

   오주 손권이 죽고 어린 손량이 즉위하자 위의 실권자 사마사 형제가 30만 대군을 일으켜 오로 쳐들어갔는데, 이때 관구검도 10만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사마소가 지휘하는 위군은 제갈각이 지휘하는 오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혈전을 벌였으나 관구검의 눈부신 분전에 힘입어 오군을 패퇴시켰다.

   기고만장해진 사마사가 더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전횡을 일삼자, 위주 조방은 황후의 아버지인 장집과 하후현, 이풍 등 세 충신에게 사마사 형제를 주살하라는 밀조를 내렸다. 그러나 그 밀조가 발각되는 바람에 도리어 자신이 폐위당하고 사마사에 의해 조모가 새 황제로 옹립되었다.

   이에 분개한 양주(揚州) 도독 겸 진동장군 관구검은 사마사 형제를 토벌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양주자사 문흠과 함께 8만 군사를 일으켜 수춘에서 거병하였다(255). 문흠은 사마의의 쿠데타 때 주살된 당시의 실권자 조상의 동향 인맥(人脈)으로 사마 씨와는 악연이 많은 인물이다.

   사마사는 진압군을 편성하여 휘하 장수인 제갈탄 등을 앞세우고 수춘으로 향했다. 반군은 문흠의 아들 문앙이 수많은 적장을 베며 분전했으나 사마사의 대군을 이기지 못하고 패퇴하였고, 결국 반군의 본거지인 수춘성이 제갈탄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문흠은 두 아들과 함께 동오에 투항하였다.

   항성에서 저항하던 관구검은 사마사의 진압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패배하여 신현성으로 피신하였다. 거기에서 관구검은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되었고, 그 수급이 사마사에게 보내지면서 관구검 문흠의 난은 평정되고 말았다. 아무리 명분이 합당해도 치밀한 준비 없는 봉기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긴 채.

   사마사가 눈병으로 죽자 그의 아우 사마소가 대도독이 되어 정사를 독단했다. 사마소의 심복 가충은 차제에 위 황제를 폐하고 제위에 오르라고 부추겼다. 슬그머니 마음이 동한 사마소는 가충을 회남에 있는 제갈탄에게 보내 의중을 떠보게 했다.

   제갈탄은 제갈량의 사촌동생으로 일찍부터 위에서 벼슬을 지냈으나 제갈량이 촉의 승상인 관계로 고위직에 오르지 못한 인물이다. 제갈량이 죽은 후 관구검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우고 나서야 비로소 양주도독 겸 대장군에 올랐다.

   가충이 요즘 낙양의 선비들이 허울뿐인 위 황제를 폐하고 사마소를 새 황제로 옹립하자고 하는데 어찌 생각하시오?’하고 물었다. 그러자 제갈탄은 위의 국록을 먹으면서 어찌 그런 불경한 말을 하느냐.’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킬 것이오.’ 하고 단호히 말했다.

   이 말을 전해 듣고 분노한 사마소는 사공(司空) 벼슬을 준다며 제갈탄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사마소의 흉계를 눈치 챈 제갈탄은 역적 사마소를 토벌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휘하의 군사 15만 명을 일으켜 거병하였다(256). 아들 제갈정을 인질로 보내며 오에도 구원을 요청했다. 오에서는 지난번에 투항한 문흠에게 7만 군사를 주며 제갈탄을 돕게 했다.

   사마소는 자신이 낙양을 비운 사이에 위 황제가 뒤통수를 칠까봐 조모 황제를 앞세우고 진압군 26만 명을 동원하여 출정했다. 먼저 오군을 제압한 사마소가 총공격을 감행하자, 제갈탄의 군사들은 패퇴하여 수춘성으로 들어갔다. 사마소의 군사들이 성을 포위했다.

   제갈탄은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킬 뿐 나가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성내에는 식량이 떨어지고 군심(軍心)마저 흩어져 사마소의 군문에 항복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성내의 두 지도자 사이에도 내분이 일어났다. 제갈탄이 문흠을 의심해서 죽이자, 문흠의 두 아들은 사마소에게 투항해버렸다.

   사마소가 문흠의 두 아들에게 준마(駿馬)와 비단을 하사하고 벼슬까지 내리자, 수춘성 안의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사마소의 대군이 사방에서 벌떼처럼 수춘성을 공격했다. 제갈탄은 남은 군사를 독려하며 분전했으나 결국 적장 호분의 칼에 목이 떨어지고 만다.

   제갈탄의 삼족을 멸한 사마소가 제갈탄의 직속부하 수백 명을 잡아들였다. 이들에게 항복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으나 이들 모두 제갈 공을 따르겠다며 죽음을 택했다고 전해진다. 제갈탄의 난도 2년 만에 평정되었다. 관구검의 난 진압에 큰 공을 세운 제갈탄, 자신이 관구검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될 줄을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당시 세간에 오는 호랑이를 얻었고, 촉은 용을 얻었는데위는 개를 얻었다.’는 얘기가 회자되었다. 호랑이는 제갈근을, 용은 제갈량을, 개는 제갈탄을 지칭하는 말임은 부연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여기서 개는 흔히 쓰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고 주인에게 충성하는 충견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마 형제의 전횡과 찬탈 시도에 용감하게 맞서서 항거한 관구검과 제갈탄의 거사는 둘 다 처참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 거사의 옳고 거름은 차치하고서라도 실권자들에게 섣불리 제위 찬탈을 시도하면 엄청난 반발이 뒤따른다는 경고를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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