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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의 네 군주를 모두 섬긴 무장 ‘정봉’

삼국지 인물열전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9. 3. 28.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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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의 네 군주를 모두 섬긴 무장 정봉

 

최용현(수필가)

 

   삼국지 후반부에 등장하는 무장들은 대부분 저평가되어있다. 후반으로 갈수록 초창기의 영웅들이 사라지면서 스토리의 동력이 점점 떨어지고 그에 따라 독자들의 관심도 비례해서 줄어들기 때문이다. 오의 무장 정봉도 그런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정봉(丁奉). 자는 승연(承淵)이고, 오의 초창기 무장들이 사라진 후에 크게 활약하여 대장군, 대사마에까지 오르는 인물이다. 항상 서성과 콤비를 이루어 활약했고, 오의 네 군주를 모두 섬겼다. 그런데 정봉의 활약상을 보면 마치 오의 네 군주에 맞춘 것처럼 기승전결(起承轉結)이 딱 맞아떨어진다.

   초대 군주 손권 치하[]. 정봉이 이름을 알리고 활약을 시작하는 시기이다. 정봉은 처음에 오의 맹장 감녕의 부하로 들어가 활약하면서 적의 깃발도 뽑고 적장도 여럿 베어 소년장수라는 명성을 얻었다. 나중에는 육손의 휘하로, 다시 반장의 휘하로 편성되어 활약했다.

   적벽대전 때, 호군교위를 맡고 있던 정봉은 대도독 주유로부터 서성과 함께 가서 동남풍을 빌려온(?) 제갈량을 죽이라는 지시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위의 조인이 지키고 있는 남군을 공략하면서 조인의 부장 우금과 일대일승부를 벌였고, 주유가 화살을 맞고 쓰러지자 서성과 함께 달려가 구해내기도 한다.

   그 후, 손권의 여동생과 결혼식을 마친 유비가 손부인과 함께 몰래 촉으로 돌아갈 때, 유비 부부를 잡아오라는 주유의 지시를 받고 서성과 함께 출동하여 유비 부부가 탄 수레를 막아섰지만, 손부인의 호통과 기세에 눌려 물러나기도 했다.

   이릉대전 때도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촉오동맹에 위기를 느낀 위의 조비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오로 쳐들어왔을 때, 선봉장을 맡은 정봉은 위의 맹장 장료를 활을 쏘아 죽이는 큰 공을 세운다. 그런데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사에는 장료가 2년 전에 병사한 것으로 나오는데, 죽은 장료를 살려내서 정봉에게 죽임을 당하게 한 것은 촉이 멸망할 때 정봉이 군사를 이끌고 도와주러 간 것에 감동한 연의의 저자가 그렇게 써 준 것이란다.

   2대 군주 손량 치하[]. 정봉이 전공(戰功)을 세워 무명(武名)을 떨치는 시기이다. 손권이 죽고 어린 손량이 즉위하자(252), 위의 실권자 사마사는 아우 사마소를 앞세워 동흥을 공격해왔다. 오군의 선봉장을 맡은 정봉은 정예수군 3천명에게 모두 갑옷을 벗고 평상복에다 단검으로 무장하라.’고 명을 내렸다. 적을 방심하도록 하는 위장전술이었다.

   위군 진영에서는 적이 소규모인데다 군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으므로 오합지졸이라 생각하고 평상시처럼 방비를 했다. 정봉이 지휘하는 선봉부대가 성난 표범처럼 위군의 영채를 습격하여 위군 수만 명을 죽이고 무수한 병기와 군수물자를 획득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여기서 기세가 꺾인 위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후퇴한다.

   위에서 사마 씨 정권을 타도하려는 관구검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에 가담했던 문흠이 오로 쫓겨 왔다. 이때 호위장군 정봉은 오의 실권자 손준을 따라 출전하여 수춘에서 위의 추격군을 크게 물리쳤는데, 이 때의 활약상은 오서 정봉전’에 기록되어 있다.

   奉跨馬持矛 突入其陣中 斬首數百 獲其軍器

  (봉과마지모 돌입기진중 참수수백 획기군기).

   ‘정봉이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수백 명의 수급을 베고 군수물자를 노획했다.’ 가히 5관돌파 참6장의 신화를 남긴 관우나 장판파에서 조조의 대군 속에서 유비의 아들을 구해온 조운에 버금가는 활약 아닌가.

   2년 후, 위의 제갈탄이 또다시 수춘에서 사마 씨 정권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을 때도 정봉은 구원군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제갈탄을 구해내지는 못했다.

   3대 군주 손휴 치하[]. 정봉이 오의 원훈(元勳)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던 시기이다. 황제 손량이 국정을 농단하는 실권자 손침을 제거하려다가 그 정보가 누설되는 바람에 폐위되어 쫓겨나고 손권의 여섯 째 아들 손휴가 새 황제로 추대되었다(258).

   새 황제 손휴도 눈엣가시 같은 손침을 제거하려고 고심하고 있었는데, 좌장군 장포의 조언에 따라 노장 정봉을 은밀히 불러 의논했다. 다음날, 납일(臘日)을 맞아 대신들이 모여들 때 손침이 들어오자 정봉은 장포와 함께 손침을 체포하여 목을 베고 3족을 멸하였다. 그 공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이 무렵, ‘서쪽(형주)에 육항이 있고, 동쪽(양주)에 정봉이 있다.’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두 맹장이 동과 서에서 나라를 지키고 있어서 든든하다는 의미이다. 육항은 이릉대전의 영웅 육손의 아들이다.

   263, 촉이 위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자 오에 위급을 알리면서 구원을 요청해왔다. 이때 오주 손휴의 출전 지시를 받은 정봉은 군사를 이끌고 촉의 성도까지 다가갔으나 촉이 이미 멸망한 후였기 때문에 회군했다.

   마지막 군주 손호 치하[]. 노장 정봉이 생을 마무리하는 시기이다. 황제 손휴가 병으로 죽자, 정봉은 승상 복양흥, 좌전군 만욱 등과 함께 오정후 손호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264). 그 공으로 대사마(大司馬)에 올랐는데, 그때부터 정봉은 위세를 과시하면서 교만해지기 시작했다.

   또 판단력도 흐려졌는지 군사적인 과욕도 부렸다. 정봉은 제갈탄의 아들 제갈정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합비를 공략했으나, 위를 이은 진의 사마준에게 격파당했다. 다음해에는 진의 곡양을 공격했고, 그 다음 해에는 다시 와구를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 일로 정봉은 손호의 추궁을 받았다.

   황제 손호가 충간하는 대신을 함부로 죽이는 등 폭정을 일삼자, 정봉은 만욱과 함께 손호의 폐위를 논의하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271). 그런데 이 일이 뒤늦게 손호에게 알려지면서 만욱은 사사(賜死)되었고, 죽은 정봉 대신에 정봉의 아들이 사약을 받았다. 남은 정봉의 가족들은 변방으로 강제 이주를 했다.

   오의 용장 정봉, 전투 때마다 선봉장을 맡아 오의 초창기 맹장인 감녕 못지않게 용맹을 떨쳤으나 삼국지 후반부에 활약한 탓에 크게 부각되지는 못했다. 말년에는 과욕을 부리고 폭군을 쫓아내려다가 가족에게까지 화를 미치게 했으니 충성과 용맹으로 점철된 그의 생애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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