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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인생의 부자 ‘하후연과 하후패’

삼국지 인물열전

by 월산처사, 따오기 2020. 4. 21.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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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인생의 부자 하후연과 하후패

 

최용현(수필가)

 

   삼국지에는 하후 성씨를 가진 무장들이 많이 나온다. 하후돈 하후연 하후걸 하후무 하후현 하후패. 삼국지 최고의 영웅 조조는 본래 하후 씨인데, 그의 아버지가 환관실력자 조등에게 양자를 갔기 때문에 조 씨가 되었다. 그러므로 삼국지에 나오는 하후 씨와 조 씨는 대부분 조조의 친척이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

   하후연과 하후패 부자(父子)조조와 같은 예주의 패국 초현 출신의 무장으로, 둘 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그런데 아버지는 적군과 싸우다 전사하지만, 아들은 자신이 떠나온 모국과 싸우다 전사한. 이들 부자가 살아온 인생을 살펴보자.

   하후연(夏侯淵), 자는 묘재(妙才). 조조의 생가 쪽 집안 동생으로, 조조가 초창기에 의병을 모집할 때 사촌형 하후돈과 거의 동시에 달려왔다. 하후연은 조조가 원소와 맞붙은 관도대전 이전까지는 주로 후방에서 군량을 보급하는 일을 맡다가, 관도대전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가했다.

   하후연은 행동이 민첩했고 기동력도 뛰어났다. 늘 빠르게 움직여 적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 나타났기 때문에 하후연은 사흘에 5백 리, 엿새에 1천 리를 간다.’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한중의 장로와 맞붙은 동관전투와 마초와의 싸움에서도 하후연은 맨 앞에서 용감하게 싸워 농우를 점령했다.

   하후연이 농우를 평정하자, 조조는 공자도 안회가 나보다 낫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며, 빠르고 용맹하기가 하후연이 나보다 낫다고 칭찬을 했다. 그러면서 용맹은 일개 필부만을 상대할 수 있다며, 장군이라면 용병(用兵)도 능하고 지략도 갖춰야한다고 지적했다. 조조도 하후연의 별명이 머리가 비었다는 의미인 백지장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정벌할 때 하후연은 선봉장으로 출전했다. 하후연은 첫 전투에서는 적의 기습에 당했으나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안개 속에서 돌진하여 양평관을 점령하고 적장 둘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자 조조는 한중을 평정하고 돌아갈 때 하후연을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임명하고 한중 수비를 맡겼다.

   하후연이 한중의 정군산에 주둔했을 때, 대치하던 유비군의 장수는 노장 황충이었다. 황충은 참모인 법정의 계책에 따라 한밤중에 정군산 서쪽의 높은 산을 기습 점령하여 하후연의 진채를 훤히 볼 수 있게 되었다. 법정이 산꼭대기에서 살펴보고 적의 방비가 허술해지거나 군기가 해이해질 때 신호를 하면 산중턱에 있는 황충이 바로 공격을 하기로 했다.

   하후연은 황충이 맞은편 산을 점령했다는 보고를 받자, 군사를 이끌고 쏜살같이 나아가 산을 포위하고 욕을 퍼부으며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황충의 군사들은 계속 응하지 않다가 하후연의 군사들이 지치고 나태해질 무렵, 법정의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산 아래로 맹렬하게 돌진했다. 이때 하후연은 용감하게 맞섰으나 황충의 칼을 맞고 전사하고 만다.

   하후연이 죽자, 유비는 하후연이 비록 우두머리지만, 한낱 용맹한 장수에 지나지 않소. 차라리 장합의 목을 벤다면 하후연의 목을 베는 것보다 열배는 나을 것이오.’ 하며 주장 하후연보다 부장 장합을 더 높이 평가했다. 죽은 하후연이 들었으면 섭섭해 하겠지만.

   하후패(夏侯霸), ()는 중권(仲權). 하후연의 아들이다. 제갈량이 쳐들어왔을 때 위의 총사령관은 조진에서 사마의로 이어졌지만, 하후패는 계속 선봉장을 맡았다. 나중에 하후패는 우장군을 맡아 정서장군 하후현과 함께 농서를 지키며 촉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하후패는 사졸들을 잘 다루었으며, 이민족인 서융과도 화합하였다.

   위 황제 조예가 죽고 여덟 살 난 조방이 제위에 오르자, 황족인 조상은 껄끄러운 사마의를 태부(太傅)로 올려주면서 그의 병권을 뺏고 대권을 장악했다. 그러자 낙향했던 사마의는 조상이 황제를 모시고 고평릉에 성묘 겸 사냥을 떠났을 때 정변을 일으켜 대권을 장악하고 조상과 그의 삼족을 모두 처형했.

   사마의는 변방을 지키며 조상과 가까이 지내던 하후현을 조정으로 소환했다. 그러자 하후현의 친척이면서 조상과도 친밀한 사이였던 하후패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사마의 부자를 성토하며 휘하 군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옹주자사 곽회가 군사를 이끌고 진압하러 오자, 하후패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나라인 촉으로 망명했다.

   하후패와 촉 사이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오래 전에 유비가 서주에서 조조에게 패퇴하여 3형제가 뿔뿔이 흩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유비는 하북의 원소에게 의탁했고, 관우는 유비를 찾으면 떠난다는 조건으로 조조진영에 머무르고 있었다. , 장비는 망탕산의 한 고성(古城)에서 산적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때 장비는 땔나무를 하러온 하후연의 조카딸을 납치하여 반 강제로 결혼을 했는데, 그 사이에서 딸 둘을 낳았다. 세월이 흘러서 유비가 촉의 황제가 되자, 장비의 큰딸은 태자 유선과 결혼하여 나중에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서 경애황후가 되었고, 다시 장비의 작은딸이 촉 황제 유선과 결혼하여 장황후가 되었다.

   하후패는 장황후의 어머니인 사촌누이 덕분에 촉에서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 하후패는 대장군 강유와 고락을 같이하면서 북벌에 대한 작전계획도 함께 수립했다. 또 위에 새로이 부각되는 걸출(傑出)한 젊은 두 장수 종회와 등애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주며 경각심을 높이기도 했다.

   강유가 북벌군을 일으켜 위를 공략할 때, 하후패는 주로 향도관(嚮導官)이나 참모가 되었으나, 강유가 여덟 번째 북벌에 나섰을 때는 선봉장을 맡아 위의 조양성을 공략하였다. 이때 하후패는 성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성안으로 들어갔다가 위의 명장 등애의 매복계에 걸려 빗발처럼 퍼붓는 화살 속에서 5백여 군사들과 함께 분투하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아버지 하후연은 황건적의 난 때부터 조조를 따라다닌 용장으로, 지략은 부족했으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민첩성과 용기로 무용을 떨치다가 전사했다. 아들 하후패는 타고난 용맹에다 지략까지 갖추었으나,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나라에 망명하여 모국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참으로 기구(崎嶇)한 인생의 부자(父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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