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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요약 - 간추린 삼국지

삼국지 인물열전

by 월산처사, 따오기 2020. 6. 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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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삼국지

 

최용현(수필가)

 

   삼국지를 아직 한 번도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또 이미 읽은 분들의 기억을 되살려 드리기 위해 소설 삼국지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간추려 본다.

 

도원결의, 그리고 동탁의 폭정

 

항우를 물리치고 유방이 세운 한(漢)은 200여 년간 이어져오다가 마침내 외척 왕망에게 제위를 찬탈당하고 말았다(8년). 한 황실의 후예인 유수가 잃었던 제위를 15년 만에 되찾아(23년) 다시 후한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후한도 12대인 영제 때에 이르자 외척과 환관의 발호로 국정이 극도로 문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드디어 태평도의 교주 장각이 이끄는 대규모의 민중봉기인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다(184년). 이에 조정에서는 관군을 편성하여 황건적 토벌에 나섰다.

이때 한 황실의 후손으로 유주 탁군에서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던 청년 유비는 호걸 관우와 장비를 만나 복숭아꽃 만발한 화원에서 형제의 의를 맺고[도원결의(桃園結義)], 앞으로 생사를 같이함은 물론 함께 뜻을 모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의병을 모집하여 황건적 토벌에 뛰어들었다. 관군과 의용군의 분전으로 황건적은 대부분 토벌되었고, 황건적 토벌에 공을 세운 군웅(群雄)들은 각자 근거지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영제가 죽자, 조정의 실권을 잡은 대장군 하진은 환관들의 반대를 누르고 자신의 누이인 하 황후가 낳은 아들을 새 황제[少帝]로 세웠다. 하진은 환관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 각지의 군웅들을 도성으로 불러들이는 격문을 보냈다가 환관들의 반격으로 참살되었다. 이때 하진의 격문을 받은 서량의 동탁이 대군을 이끌고 입성하여 조정의 대권을 차지했다. 동탁은 무예가 뛰어난 여포를 부하로 맞으면서 더욱 기세등등하여 포악한 공포정치를 일삼았다.

동탁은 하 태후를 무참하게 죽이고 소제를 폐위하는 한편, 소제의 이복동생인 아홉 살 진류왕을 새 황제[獻帝]로 세웠다. 이가 바로 후한의 마지막 황제이다.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쫓기는 신세가 된 조조는 하남성 중모현에서 불심검문에서 걸려 붙잡혔으나 진궁의 도움으로 다시 풀려났다.

조조는 곧 동탁토벌의 격문을 각지에 보냈다. 이에 공손찬, 원소, 원술, 손견 등 각지의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모여들었다. 이들은 곧 연합군을 구성하여 원소를 맹주로 추대하고 동탁 토벌에 나섰다. 연합군과 맞선 동탁은 선봉장 화웅의 눈부신 분전으로 기세를 올렸으나 공손찬의 막하에 있던 관우가 화웅의 목을 벰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다. 동탁은 다시 맹장 여포를 내보냈으나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의 분전으로 다시 패퇴했다.

이에 동탁은 도성 낙양을 버리고 장안으로 천도했다. 장안에 도착한 동탁은 그곳 주민들의 재물을 닥치는 대로 노략질하면서 장안 교외에다 거대한 미오성을 짓고 그곳에 엄청난 식량과 금은보화를 비축해놓고 마냥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난세에 일어선 군웅들

 

연합군의 맹주 원소가 무능하여 제후들을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 데다 제후들끼리도 서로 견제하는 바람에 연합군은 결속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때 낙양에 입성한 연합군의 선봉장 손견은 궁궐의 우물에서 전국(傳國)의 옥새를 건졌다. 이에 웅지를 품은 손견이 정보 황개 한당 조무 등 네 장수와 함께 강동으로 향하는 것을 필두로 연합군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근거지로 돌아갔다.

그러자 연합군의 맹주 원소는 ‘손견을 저지하여 옥새를 뺏어라.’는 밀서를 형주자사 유표에게 보냈다. 한실의 종친인 유표는 부장 황조를 보내 남하하는 손견을 저지했다. 두 진영의 군사끼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황조의 매복계에 걸린 손견이 전사하고 말았다.

이 무렵 북방에서는 공손찬이 맨 먼저 기업(基業)을 이룩했고, 하북에서는 사세삼공의 명문출신 원소가 세력을 키우며 호시탐탐 천하를 넘보고 있었다. 또 남양에서는 원소의 사촌동생 원술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고, 산동에는 조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때 공손찬의 막하에 있던 유비도 두 의제(義弟)와 함께 서주목 도겸이 마련해준 서주의 소패성에서 힘을 기르고 있었다. 바야흐로 군웅할거 시대가 온 것이다.

한편, 장안에서 폭정을 일삼던 동탁은 조정 중신 왕윤과 그의 수양딸 초선의 연환계(連環計)에 걸려 대권을 잡은 지 3년 만에 부하인 여포의 손에 무참히 참살 당했다. 동탁이 죽자 그의 부하장수인 이각과 곽사가 장안을 기습하여 다시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들은 황제를 협박하여 왕윤을 목 베는 한편, 제멋대로 국정을 전단(專斷)했다. 그러다가 이각과 곽사가 서로 싸움이 붙어 도성 장안은 이들의 전쟁터로 변했다. 황제는 장안을 탈출하여 들판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이때 산동에서 기회를 엿보던 조조는 재빨리 군사를 이끌고 와서 이각과 곽사의 무리를 패퇴시키고 황제를 낙양으로 맞아들였다.

조정의 실권을 잡은 조조는 모사 곽가의 조언으로 도성을 허도로 옮겨 자신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이제 황제의 명으로 제후를 지휘할 수 있게 된 조조는 순욱 순유 정욱 곽가 만총 등의 뛰어난 모사와 하후돈 하후연 조홍 조인 허저 전위 서황 등의 기라성 같은 무장들을 갖춘 막강한 세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조조는 먼저 유비와 여포를 서로 갈라놓기 위해 황제의 이름으로 조서를 보내 서주의 유비와 남양의 원술을 서로 싸우게 했다. 유비가 원술을 치는 사이, 여포가 서주성을 차지해버렸다. 유비는 서주의 소패성으로 물러나 울적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이때 원술의 휘하에 있던 손책은 나이가 들자 다시 선부(先父)의 큰 뜻을 계승하려는 의욕이 생겼다. 그는 손견에게서 물려받은 옥새를 담보로 맡기고 원술에게서 군마를 빌려 선부를 도운 장수들인 정보 황개 한당과, 절친한 친구 주유 등과 함께 강동으로 향했다.

아비를 닮아 영웅의 기상을 타고난 손책은 강동을 차례차례 평정했다. 창업의 기반을 굳힌 손책은 다시 그곳의 명현(名賢) 장소와 장굉을 비롯하여 태사자와 주태 등 뛰어난 무장들을 새로 얻어 탄탄한 진용을 갖추었다. 이제 그는 강동을 발판으로 천하제패를 꿈꾸는 막강한 신흥군벌로 등장했다.

 

군웅들의 쟁패전

 

조조는 옛 동탁의 부하인 장제의 조카 장수의 항복을 받고 장제의 처 추 씨와 진중에서 음락(淫樂)을 즐겼다. 조조가 자신의 숙모를 농락하는 데 분개한 장수는 다시 마음을 바꾸고 조조의 막사를 기습했다. 이때 조조의 막사를 지키고 있던 전위가 전사하고 조조의 아들 조앙, 조카 조안민까지 목숨을 잃었다. 조조는 크게 뉘우치고 다시 각오를 가다듬었다.

한편, 그간에 이룬 성공에 만족한 남양의 원술은 손책에게서 얻은 옥새를 기화로 수춘성에서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황제를 참칭한 것이었다. 이에 조조는 손책 여포 유비 등과 함께 원술 토벌의 대군을 일으켰으나, 장기전으로 인해 군량이 모자라 군사들의 불평이 늘어났다. 조조는 군량담당 왕후를 군량착복자로 뒤집어씌우고 그의 목을 베어 성난 군사들을 무마한 다음, 다시 맹공을 퍼부어 마침내 수춘성을 함락시켰다. 원술은 회수를 건너 도망쳤다.

조조는 다시 예주의 유비와 함께 서주의 여포를 공격했는데, 이 전투에서 하후돈은 눈에 화살을 맞아 애꾸가 되었다. 모사 진궁, 맹장 장료와 장패 등과 함께 결전을 준비한 여포는 적토마를 타고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 서주성을 뺏겼다. 하비성으로 쫓겨 간 여포는 처첩의 모함에 빠져 모사 진궁을 의심하는 등 변덕을 부리다가 잠든 사이에 부하장수들에게 묶인 채 조조 앞에 무릎을 꿇리는 신세가 되었다.

조조는 맹장 여포와 자신의 은인이었던 진궁의 목을 베고, 무장 장료는 살려주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여포를 평정한 조조는 유비와 함께 허도로 개선했다. 조조는 사냥터에서 황제를 업신여기는 행동을 했고, 조조에게 욕을 당한 황제는 국구(國舅) 동승에게 조조를 제거하라는 밀조를 내렸다. 이에 동승은 길평 마등 유비 등의 동조자를 규합하고 조조를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때, 전에 유비를 보살펴주었던 북방의 효웅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망했다. 유비는 원술을 친다는 핑계로 조조에게서 군사를 빌려 조조의 울타리에서 빠져나왔다. 이 무렵, 급격히 쇠락해진 원술은 옥새를 사촌형 원소에게 주려고 가다가 유비의 군사에게 참패하여 목숨을 잃었다. 옥새는 마침내 조조의 손에 들어가 원래의 자리인 한의 황제에게로 되돌아갔다.

 

조조와 원소의 결전, 관우의 오관돌파

 

공손찬을 패망시키고 하북 4개주를 차지한 원소는 조조와의 일전을 준비했다. 전풍 저수 심배 봉기 허유 등 기라성 같은 모사와 안량 문추 등 발군의 무장들을 보유하고 있던 원소는 대군을 일으켜 허도를 향해 출진했다. 이에 조조도 군사를 일으켜 맞서니 바야흐로 두 영웅의 결전이 시작되었다.

두 진영의 군사들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이때 소강상태를 틈타 허도로 돌아온 조조는 사신을 보내 장수에게서 항복을 받아내고, 장수의 모사 가후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조조는 다시 기인 예형을 형주의 유표에게 보내는데, 예형의 심한 독설을 견디지 못한 유표의 부장 황조가 예형을 죽이는 바람에 조조와 유표는 서로 원수가 되었다.

그 무렵, 국구 동승은 태의(太醫) 길평과 함께 조조를 독살하려다가 사전에 누설되는 바람에 유비와 마등을 제외하고 모두 잡혀 죽임을 당했다. 유비의 가담사실을 알고 격노한 조조는 대군을 일으켜 서주를 공략했다. 유비군은 패퇴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유비는 하북의 원소에게로 갔고, 장비는 망탕산으로 향했다.

이때 유비의 가족들과 함께 서주의 하비성을 지키고 있던 관우도 패퇴하여 조그만 토산에서 조조군에게 포위되었다. 관우의 충의와 무용을 흠모해온 조조는 장료를 관우에게 보내 항복을 권했다. 관우는 옥쇄(玉碎)하려고 했으나 함께 죽기로 맹세한 도원결의와 유비의 가족을 생각하여 ‘유비가 있는 곳을 알게 되면 즉시 떠난다.’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조조는 관우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금은보화는 물론, 황제의 이름으로 벼슬을 주고, 나중에는 여포가 타던 적토마까지 주었지만 끝내 관우의 마음을 돌려놓지는 못했다.

원소는 조조와의 결전에서 연전연승했다. 원소의 맹장 안량과 문추에게 계속 참패를 당한 조조는 마침내 관우를 불러냈고, 관우는 안량과 문추를 차례로 목 베어 조조의 후의에 보답했다. 이때 유비가 원소진영에 있음을 알게 된 관우는 보장된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저 유명한 오관돌파(五關突破)의 신화를 남기며 유비를 찾아 떠난다.

이 소식을 들은 유비도 원소 곁을 떠남으로써 드디어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망탕산 부근에서 다시 만나 도원의 결의를 이어가게 되었다. 이때 유비는 공손찬의 패망으로 떠돌이 신세가 된 무장 조운을 새로 얻었다.

 

일어선 손권, 원소를 무찌르고 강북을 제패한 조조

 

소패왕으로 불리며 강동에서 맹위를 떨치던 손책은 조정에 표문을 보내 대사마 벼슬을 달라고 했으나 조조에 의해 좌절되었다. 직정적(直情的)인 성격의 손책은 단숨에 허도로 쳐들어가 조조와의 일전을 겨루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으나 자객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말았다.

때마침 원소의 사자가 와서 함께 조조를 치자고 제의하자, 손책은 흔쾌히 수락하면서 원소의 사자를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신선(神仙)으로 알려진 우길이 나타나자, 중신들과 강동의 주민들이 모두 우르르 달려가 그에게 경배했다. 이를 본 손책은 시샘을 느끼고 우길을 죽여 버렸다.

그러자, 우길의 귀신이 씐 듯 발광하던 손책은 마침내 중태에 빠져 아우 손권에게 후사를 맡기고 죽었다. 열아홉 살에 강동의 새 주인이 된 손권은 장소와 주유 등을 스승의 예로 후대했고, 새로이 준재(俊才) 노숙과 제갈근을 얻어 강동을 반석 위에 올린다. 바야흐로 손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편, 하북의 원소는 70만 대군을 일으켜 조조와의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이때 전풍과 저수 등의 모사들은 시기가 좋지 않다며 출진을 말렸으나, 원소는 이들을 옥에 가두고 관도를 향해 나아갔다. 조조는 정병 7만으로 원소와 맞붙었다. 삼국지 3대전의 하나인 관도대전이 일어난 것이다.

원소군은 서전에서 크게 이겼다. 참패한 조조는 후퇴할 생각을 하고 허도에 있는 모사 순욱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에 순욱은 요충지를 굳게 지키면서 빈틈을 노리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단숨에 무찔러야 한다고 회신을 보내왔다. 다시 힘을 얻은 조조는 고향친구 허유로부터 원소군의 군량창고 경비가 허술하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마침내 기습작전으로 원소군의 군량을 모두 불태운 조조군이 맹공격을 가하자, 사기가 무참히 꺾여버린 원소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원소는 세 아들과 조카의 군사를 끌어 모아 다시 반격을 시도했지만, 패배를 거듭하다가 쓰러져 죽고 만다. 원소가 죽자, 원담 원희 원상 세 아들이 원소의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하북 4개주를 모두 조조에게 내준다.

마침내 조조는 필생의 라이벌 원소를 격파하고 강북을 평정했다. 조조는 그 기념으로 장하 언덕에다 동작대를 지어 한껏 기상을 뽐낸 다음, 다시 형주로 칼끝을 돌렸다.

 

제갈량을 얻은 유비, 장판파의 영웅 조자룡과 장비

 

그때 유비는 종친 유표의 배려로 형주의 신야에 머물고 있었다. 유표가 후계 자리를 고민하자, 유비는 큰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자 작은아들의 어미인 유표의 후처 채부인과 처남 채모는 유비를 죽이려고 군사를 풀어 추격했으나, 유비는 새로 얻은 적로마(馰盧馬)가 단계를 훌쩍 뛰어넘는 바람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유비는 준재 서서를 얻어 군사(軍師)에 임명했으나 서서의 노모가 조조에게 볼모로 잡혀 있는 것을 알고는 서서를 조조진영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서는 떠나기 전에 수경선생 사마휘가 말하던 복룡 제갈량을 유비에게 천거해주었다. 유비는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제갈량을 얻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서촉을 평정하여 근거지로 삼고, 조조와 손권과 함께 천하를 삼분하는 원대한 구상을 제시했다.

조조는 강북을 제패한 여세를 몰아 형주 평정의 기치를 들었다. 이때 조조 진영에 있던 명사(名士) 공융은 ‘유표와 유비는 둘 다 한실의 종친이므로 그들을 치는 것은 부당하다.’고 간했다가 조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드디어 조조의 대군은 형주로 향했다.

이때 병상에 누워있던 형주자사 유표가 죽자, 채부인은 자기가 낳은 유종을 형주의 새 주인으로 세웠고, 이때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유종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조조에게 항복했다. 유비는 형주 피난민들을 이끌고 강릉성으로 향했으나 뒤쫓아 오던 조조군에게 당양벌에서 추월당했다.

이때 조운은 유비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단기(單騎)로 장판파에서 조조의 대군 속으로 들어가 무수히 적병들을 찌르고 베면서 마침내 미부인과 어린 아두를 찾았으나, 미부인은 아두를 부탁하고 우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조자룡은 아두를 품에 안고 다시 창과 칼날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적병을 베어 넘기며 조조의 대군 사이를 뚫고 나왔다.

이때, 장비는 장판교에서 혼자 말을 타고 조조의 대군을 막아섰다. 장비는 ‘누구든지 나와서 덤벼라!’고 고함을 질렀다. 장비의 고함소리에 놀란 조조군은 겁에 질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조조는 얼른 군사들을 후퇴시켰다. 당양 장판파에서의 조운과 장비의 눈부신 분전으로 유비는 조조의 추격에서 벗어나 다시 군마를 정돈할 수 있었다.

 

불타는 적벽, 형주를 차지한 유비

 

형주를 차지한 조조는 강동까지 정벌하려고 양자강의 적벽에 진을 치고 손권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유비는 제갈량을 손권에게 보내 함께 조조를 치자고 했다. 손권은 주전파인 주유와 노숙의 진언을 받아들여 유비와 힘을 합쳐서 조조군을 물리치기로 결전의지를 굳혔다. 드디어 삼국지 최고의 결전장인 적벽대전의 막이 오른다.

손권으로부터 대도독에 임명된 주유는 조조군이 수전(水戰)에 약한 것을 살피고 화공(火攻)으로 적을 무찌르기로 전략을 세웠다. 주유는 제갈량에 버금가는 기재인 방통을 조조에게 보내 배 멀미에 시달리는 조조군의 선단을 모두 쇠사슬로 연결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주유는 다시 고육계를 통해 노장 황개를 조조에게 거짓 항복토록 한 다음, 제갈량의 기도(?)로 동남풍이 부는 때를 틈타 황개의 투항선 20척에다 불을 붙여 조조의 선단을 향해 돌진케 했다. 쇠사슬로 묶여진 조조의 선단은 모두 한꺼번에 불이 붙었고, 이때 손권과 유비의 5만 연합군이 조조의 진채를 습격하니 조조의 백만 대군은 여지없이 참패하였다.

명장 주유가 이끄는 연합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때 제갈량은 조조가 패주하는 길목마다 복병을 배치했다. 이윽고 조조가 패잔병과 함께 화용도에 나타났지만, 그곳을 지키고 있던 관우는 전에 조조에게 입었던 후의를 생각하여 조조를 그냥 보내주고 만다.

유비는 재빨리 군사를 움직여 형주를 차지했고, 인근의 여러 군(郡)을 평정하면서 마량과 마속 형제를 비롯하여 노장 황충, 맹장 위연까지 새로 얻었다. 적벽대전의 전리품이라고 할 수 있는 형주를 유비가 먼저 차지하자, 강동의 손권과 주유는 계속 형주를 돌려달라고 유비에게 요구한다. 형주문제는 이후 유비와 손권 사이의 골칫거리 외교문제가 된다.

유비의 감부인이 죽자, 주유는 형주를 되찾기 위해 손권의 누이동생을 유비와 결혼시킨다고 속여 유비를 강동으로 유인해서 죽이려는 계략을 꾸몄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제갈량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손권은 누이만 유비에게 주게 되었다. 제갈량에게 여러 번 당한 주유는 마침내 울화통이 터진 데다, 전에 화살을 맞았던 상처까지 도져서 죽는다.

주유가 죽자, 후임은 온건파인 노숙이 이어받았다. 노숙은 적벽대전 때 조조의 선단을 쇠사슬로 묶게 한 방통을 손권에게 천거했으나 손권은 기용하지 않았다. 방통은 유비를 찾아갔다. 유비도 처음엔 그를 중용하지 않았으나 곧 부군사로 임명하여 제갈량과 함께 전략을 수립하도록 했다. 드디어 유비는 두 기재(奇才) 복룡과 봉추를 모두 얻었다.

한편, 조조는 서량의 군벌 마등을 도성으로 불러들였다. 전에 국구 동승과 함께 조조제거음모에 가담했던 마등은 왠지 꺼림칙했으나 조조가 황제의 조서로 부르니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마등은 아들 마초에게 서량을 지키게 하고 5천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향했다. 조조가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등은 거꾸로 조조암살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계획이 발각되어 마등은 결국 조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초는 서량태수 한수와 맹장 방덕, 종제(從弟) 마대와 함께 서량군 20만을 이끌고 허도를 향해 출진했다. 조조군은 마초의 용맹에 고전했으나 허저의 분전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조조는 마초와 한수 사이를 이간시키는 데 성공하여 마침내 마초를 한중으로 쫓아냈다.

 

서촉을 평정한 유비, 위왕이 된 조조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서촉은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곳에도 난세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인근 한중에서 장로가 서촉 국경을 침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익주자사 유장은 형주의 유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호시탐탐 서촉을 노리고 있던 유비는 서촉의 관료 장송과 법정의 도움을 받으며 방통 황충 위연 등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서촉으로 향했다. 유비는 처음에는 유장과 잘 지냈으나 차차 두 사람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유비군과 촉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유비의 군사(軍師) 방통이 낙봉파에서 전사했다.

유비는 형주의 수비를 관우에게 맡기는 한편, 제갈량과 장비, 조자룡 등에게 서촉 정벌에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제갈량은 새로 장로 진영에 가담한 맹장 마초를 지모로써 사로잡아 유비진영으로 끌어들였다. 파죽지세로 촉군을 격파해가던 유비는 드디어 성도를 점령하고 서촉 평정을 마무리지었다.

그러자, 강동의 손권은 ‘서촉을 얻었으니 형주를 반환해 달라’고 유비에게 요청했고, 유비는 형주의 일부를 떼어주려고 했으나 형주를 지키고 있는 관우가 반대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노숙은 관우를 진중으로 초대했다. 그러나 칼 한 자루만 갖고 찾아온 관우의 당당하고 빈틈없는 처신에 노숙은 관우를 죽일 기회를 잡지 못하고 그냥 돌려보내주고 만다.

이 무렵 조조는 허수아비 황제로부터 위공에다 구석(九錫)의 특전까지 받았다. 이때 조조의 참모 순욱과 그의 조카 순유는 한실에의 충성을 내세워 조조의 부당함을 간하다가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조조는 다시 서쪽으로 눈을 돌려 서촉에 인접한 한중을 평정했다.

이때 합비를 지키고 있던 장료로부터 손권의 대군이 쳐들어왔다는 전갈을 받은 조조는 급히 군사를 이끌고 합비를 구원하러 갔다. 이 전투에서 조조군의 맹장 장료와 오의 맹장 감녕이 눈부신 활약을 했고 손권의 경호를 맡은 무장 주태는 조조군의 포위를 뚫고 손권을 여러 번 구해냈다.

다시 허도로 돌아온 조조는 위왕으로 즉위했다. 위 왕궁이 건립되자 조조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환술사인 좌자가 나타나 조조를 놀렸다. 조조는 좌자의 목을 베었으나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이에 조조는 점복의 명인 관로를 불러 점을 쳤는바, 관로는 연초에 허도에 큰 불이 나며, 곧 유비가 한중으로 쳐들어온다고 예언했다.

정월 대보름날, 관로의 예언대로 한실을 섬기는 조조의 반대세력들이 도성에 불을 지르고 모반을 일으켰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조조는 신속하게 불을 끄는 한편,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처형한다.

 

삼국정립, 관우와 조조의 죽음

 

서촉 평정을 마무리 한 유비는 인접한 한중을 뺏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조조도 대군을 이끌고 한중을 구원하러 왔다. 이때 촉군의 노장 황충은 조조군의 장수 하후연을 죽이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조조가 그날 밤 군호를 ‘계륵(鷄肋)’이라고 하자, 조조의 심중을 간파한 양수는 전군에게 철수준비를 시켰다. 조조는 군령을 어지럽힌 죄로 양수의 목을 베고, 다시 맹공격을 했으나 위연에게 화살을 맞아 낙마하는 등 참패를 당했다. 마침내 조조는 한중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제 형주와 서촉, 그리고 한중까지 평정한 유비는 스스로 한중왕에 올랐다. 그리고 제갈량을 군사(軍師)로, 관우 장비 조운 황충 마초를 5호대장군으로, 위연을 한중태수로 임명하는 등 비로소 한 국가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제 천하는 조조 손권 유비에 의해 완전히 삼분(三分)되었다.

한편, 형주를 지키고 있는 관우가 위의 무장 조인이 지키던 번성을 계속 공략하자, 조조는 우금과 방덕을 지원군으로 보내 관우를 막게 했다. 관우는 양강 상류에 둑을 쌓았다가 터뜨려 지원군을 수장(水葬)시키며 적장 우금의 항복을 받고 방덕의 목을 베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때 독화살을 맞은 관우는 신의 화타의 집도(執刀)로 상처를 치료했다.

이때 노숙의 뒤를 이어 오의 사령관이 된 여몽은 병을 핑계로 일선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에 무명(無名)의 육손을 배치했다. 육손을 애송이로 본 관우는 주력부대를 모두 위의 번성 쪽으로 옮겼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여몽은 재빨리 움직여 형주성을 점령했다. 맥성으로 쫓겨 간 관우는 오군에게 사로잡혀 참수되고 만다.

오에서는 촉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관우의 수급(首級)을 조조에게 보냈다. 조조는 관우에게 형왕(荊王)의 시호를 내리고 후히 장사지내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조조도 죽었다. 조조가 죽자 맏아들 조비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조비는 아우 조창과 조식을 핍박하여 멀리 변방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화흠 등의 중신의 도움으로 후한 마지막 황제로부터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제위를 찬탈하여 위 황제에 올랐다(220년).

전한 이백년, 후한 이백년 동안 이어져오던 한 왕조는 마침내 조조의 아들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그 이듬해, 한중왕 유비도 한의 부흥을 내세우며 촉 황제에 올랐고(221년), 강동의 손권도 오왕이라 칭하다가 다시 오 황제에 오르니(229년) 천하에 한 사람만 있어야할 황제가 세 사람이나 되었다.

 

이릉전투, 제갈량의 북벌

 

촉 황제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거국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오 정벌을 준비했다. 그러나 출진에 앞서 장비가 부하에게 암살당하여 그 수급이 오에 보내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함께 죽기로 맹세했던 두 아우가 모두 죽자, 이성을 잃은 유비는 제갈량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군을 이끌고 오로 쳐들어갔다.

이때 오에서는 제갈량의 친형 제갈근을 보내 ‘형주를 도로 촉에게 돌려주겠다.’며 화친을 제의했으나 유비는 듣지 않았다. 관우와 장비의 아들 관흥과 장포의 활약으로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촉군은 승승장구하며 강을 따라 오의 국경 깊숙이 들어갔다. 오주 손권은 지략이 뛰어난 명장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촉군을 막게 했다.

여름이 되었다. 한여름 뙤약볕을 견디지 못한 촉군이 계곡가의 숲에 장사진(長蛇陳)을 치자, 육손은 드디어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오군은 촉군이 숙영(宿營)하는 숲에 불을 지르며 맹공을 퍼부었고, 촉군의 시체가 온 숲과 계곡을 뒤덮었다. 참패한 유비는 백제성으로 패주했고, 유비의 거국적인 대군을 무찌른 육손은 일약 이릉대전의 영웅이 되었다.

백제성에서 병이 든 유비는 제갈량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고 죽었다. 유비의 범용(凡庸)한 아들 유선이 촉의 새 황제가 되었다. 이제 촉의 운명은 제갈량의 한 몸에 달려 있었다. 제갈량은 등지를 오에 보내 촉오동맹을 맺는 한편, 남쪽 국경을 어지럽히던 남만정벌을 단행했다. 남만왕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고 일곱 번 놓아주면서 결국 마음으로 따르게 한 제갈량은 저 유명한 출사표를 바치고 북벌에 나섰다.

이때 위에서는 조비가 죽고 아들 조예가 위 황제로 즉위했다. 제갈량이 이끄는 북벌군은 하후무와 조진이 이끄는 위군에게 연승을 거두며 준재 강유를 새로 얻었다. 그러자 사마의가 위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촉군은 가정에서 마속이 명령을 어기고 산꼭대기에 진을 치는 바람에 위의 선봉장 장합에게 참패했다. 전군을 철수한 제갈량은 울며 마속의 목을 베었다.

제갈량은 여섯 차례에 걸쳐 위 정벌에 나섰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장원에서 병을 얻어 54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234년). 촉의 군권이 양의에게로 돌아간 것에 불만을 품은 위연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으나, 제갈량이 남긴 계책대로 위연의 목을 벤 촉군은 제갈량의 영구(靈柩)를 앞세우고 성도로 철수했다.

 

사마 씨의 혁명극과 진의 삼국통일

 

제갈량이 죽자 삼국은 한동안 싸움을 그쳤다. 명장 사마의는 일약 위의 원훈(元勳)이 되었다. 위 황제 조예가 서른여섯 나이로 사망하자, 그의 8살 난 태자 조방이 위 황제로 즉위했다. 이때 조진의 아들 조상이 위의 실권자가 되었으나 사마의가 정변을 일으켜 실권자 조상을 처단하고 위의 대권을 거머쥐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하후연의 아들 하후패는 촉으로 망명했다. 사마의가 죽자 맏아들 사마사가 대장군이 되어 실권자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오의 손권도 일흔한 살의 나이로 죽었다. 어린 아들 손량이 대통을 이었다. 이때 위군이 오로 쳐들어오자 실권자인 제갈각이 나서서 위군을 물리쳤다. 기세가 오른 제갈각은 촉장 강유와 연합하여 위로 쳐들어갔다가 사마사 형제의 분전으로 패퇴했다. 그러자 제갈각은 반대파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순준에 이어 손침이 오의 실권자가 되어 권세를 휘둘렀으나, 황제 손휴의 밀지를 받은 노장 정봉에게 목숨을 잃었다.

한편, 성년이 된 위 황제 조방이 실권자 사마사를 제거하려 하자, 사마사는 오히려 조방을 내쫓고 새로 조모를 위 황제로 세웠다. 이에 무장 관구검과 제갈탄이 위 황실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사마형제의 전횡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차례로 진압되고 만다.

그 후 사마사가 눈병으로 죽자 그의 아우 사마소가 실권자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이때 위 황제 조모가 또다시 사마소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살해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사마소는 조환을 위 황제로 세웠다. 사마소는 드디어 촉을 멸하기로 결심하고 무장 등애와 종회를 시켜 두 갈래로 쳐들어가게 했다.

촉의 명장 강유가 국경에서 종회의 대군을 막고 있는 사이, 등애가 성도를 포위하여 촉 황제 유선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263년). 제갈량이 죽은 지 30년 만에 유비가 세운 촉은 멸망하고 말았다. 촉을 멸망시킨 사마소는 진왕이 되었다.

그 후 사마소가 중풍으로 죽자, 진왕을 물려받은 그의 아들 사마염은 위 황제 조환으로부터 제위를 찬탈하여 진황제로 즉위했다. 45년 전에 조조의 아들 조비가 후한 마지막 황제로부터 제위를 찬탈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이번에는 조비의 손자가 신하에게 제위를 찬탈 당했다(265년).

오에서는 손량, 손휴에 이어 손호가 황제로 즉위했다. 손호가 연일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는 사이 오의 국력은 극도로 피폐해져 갔다. 마침내 오의 명장 육손의 아들 육항이 죽자, 드디어 진 황제 사마염은 태부 양호의 유언대로 두예와 왕준을 육로와 수로로 보내 오를 공략하게 하니, 오주 손호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건업의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손견과 손책이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창업하고 수성의 명군 손권이 오랫동안 지켜오던 오도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280년). 황건적의 난 이래 약 100년 동안 중원을 휩쓸었던 난세의 폭풍도 마침내 잠잠해졌다. 진(晋)의 사마염에 의해 천하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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