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3200년 전, 그리스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은 주변의 여러 도시왕국들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패권을 잡는다. 그러나 그의 동생인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오랜 전란에 지친 나머지 에게 해 연안에 있는 신흥강국 트로이와 독자적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지금의 터키 해안에 있는 트로이 왕국은 30여 년째 프리아모스 왕이 통치를 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큰 왕자 헥토르(에릭 바나 扮)와 함께 친선사절로 스파르타에 간 작은 왕자 파리스(올랜도 블룸 扮)가 빼어난 미모의 스파르타 왕비 헬렌과 눈이 맞아 그녀를 몰래 데리고 귀국한다.
파리스에게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 왕은 형 아가멤논을 찾아가 트로이를 응징해줄 것을 요청한다. 아가멤논은 빼앗긴 헬렌 왕비를 되찾아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그리스 전역에 동원령을 내린다. 그러나 그의 속셈은 모든 도시왕국들을 규합하여 그리스 제국을 건설하고 트로이까지 장악하여 에게 해의 패권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한편, 그리스 최고의 전사 아킬레스(브래드 피트 扮)는 초인적인 무예를 지니고 있어서 트로이 정복에 꼭 필요한 존재였지만 아가멤논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출전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지략이 뛰어난 이타케 왕 오디세우스가 찾아가 후세에 영웅으로 기록될 것이라며 출전을 간곡히 요청하자 마음을 바꾼다.
드디어 아가멤논이 이끄는 5만 연합군을 실은 그리스 함대가 돛을 올리면서 트로이 전쟁이 발발한다. 아킬레스는 수십 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선봉에 서서 트로이의 사당을 점령하고 태양신 아폴론 동상의 목을 베며 기선을 제압한다. 그러나 전리품으로 데려온 아름다운 여사제를 아가멤논이 빼앗아 가버리자 분노하여 더 이상의 출전을 거부한다.
파리스 왕자는 자신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자책하다가 메넬라오스 왕과 결투를 벌이지만 패색이 짙어지자 무용(武勇)이 뛰어난 형 헥토르에게로 도망쳐온다. 헥토르가 메넬라오스를 찔러 죽이면서 격앙된 양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헥토르가 지휘하는 트로이군이 성위에서 일사분란하게 활을 쏘자, 아킬레스가 없는 그리스 연합군은 수세에 몰려 패퇴한다.
결국, 여사제를 돌려받은 아킬레스는 자신의 갑옷을 입고 출전한 어린 사촌동생을 자신으로 오인해서 죽인 트로이 최고의 장수 헥토르와 맞대결을 벌이게 된다. 여기서 아킬레스가 승리하고 헥토르가 전사하지만 트로이의 성문은 도무지 열리지 않는다.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져 양 진영의 군사들이 모두 지쳐갈 무렵, 오디세우스는 거대한 목마(木馬)를 만들어 해안에 남겨놓고 군사들을 모두 물리는 계책을 쓴다. 요즘은 컴퓨터 바이러스로 더 유명해진, 이른바 ‘트로이 목마’ 작전이다. 이에 현혹된 트로이 군사들은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고 승리를 축하하며 잔치를 벌인다.
한밤중에, 목마 속에 숨어있던 오디세우스와 병사들이 나와 성문을 열고, 동시에 해안절벽 뒤에 숨어있던 그리스 군사들이 다시 쳐들어오면서 난공불락의 트로이성은 단숨에 함락된다. 이 와중에 아가멤논과 프리아모스 왕은 죽고, 여사제를 찾으러 온 아킬레스도 파리스가 쏜 화살에 발뒤꿈치를 맞고 숨이 끊어진다. 파리스와 헬렌이 트로이를 탈출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볼프강 페터슨 감독이 2004년에 만든 ‘트로이(Troy)’는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엄청난 제작비를 투입하여 만든 블록버스터로, 7만 5천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한 전투장면은 박진감이 넘친다. 아킬레스 역을 맡은 브래드 피트는 약간 건방지면서도 섹시한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고, 헥토르 역을 맡은 에릭 바나는 불세출의 영웅 아킬레스와 맞장을 뜨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 무장의 전범(典範)을 보여주어 큰 박수를 받았다.
두 노배우도 눈에 띈다. 아킬레스의 어머니로 나오는 여신 테티스는 ‘닥터 지바고’(1965년)에서 라라 역을 맡았던 줄리 크리스티가 아닌가. 하마터면 몰라볼 뻔 했다. 또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년)의 명우 피터 오툴은 프리아모스 왕으로 나와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2013년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스 신화를 보자. 트로이 왕실에 아들이 태어나자, 이 아들이 후일 트로이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신탁(神託)이 내려진다. 왕은 산 절벽에 아기를 떨어뜨리라고 하인에게 명한다. 그러나 갓 태어난 왕자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하인은 아기를 산에 버려두었고, 그 아이는 파리스라는 이름으로 목동의 손에 키워진다. 청년이 된 파리스는 왕실에서 주관하는 무술대회에 나갔다가 트로이의 왕자임이 밝혀진다.
파리스 왕자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에 참가했다가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선택하는 역할을 떠맡게 된다. 파리스가 아프로디테를 선택하자, 아프로디테는 상으로 미녀 헬렌을 파리스에게 주기로 한다. 스파르타의 왕비 헬렌이 자국을 방문한 파리스 왕자와 사랑에 빠져 몰래 도피행각을 벌이게 되면서,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는 발군의 용장 아킬레스의 활약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와 트로이의 10년간의 전쟁 이야기이고, 승리를 거두고 고향 이타케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가 겪은 해양모험을 그린 것이 ‘오디세이’이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전쟁에 출전하면서 아들을 가정교사인 멘토에게 맡기는데, 이것이 조언자, 스승을 뜻하는 ‘멘토’의 어원이 되었다.
아킬레스는 여신 테티스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테티스는 어린 아킬레스를 스틱스(황천)에 담가서 불사신(不死身)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강물에 담글 때 그녀가 손으로 잡고 있던 발뒤꿈치 부분이 강물에 닿지 않아 아킬레스의 치명적인 급소가 되었고, 그래서 그 부분을 ‘아킬레스건’이라 하게 되었다.
트로이 전설은 신화 속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었지만, 1873년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 트로이에서 왕관과 황금잔 등을 발굴하면서 실재한 역사임이 증명되었다. 슐리만이 발굴한 트로이 유물들은 베를린으로 옮겨졌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의 침공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또 한 가지, 슐리만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시대만을 염두에 두고 발굴 작업을 했기 때문에 BC 2000년 이후의 유적은 발굴과정에서 대부분 파괴되어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트로이는 지금도 수많은 고고학자들이 발굴과 조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