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1990년대 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가 어쩌고 하면서 1999년 7월에 말세(末世)가 온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돌았다. 또 세기말을 맞아 요한계시록을 근거로 한 휴거설도 회자되곤 했었다. 그때 종말론을 믿고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한 사람도 있었고, 학교를 그만두고 아프리카에 선교하러 간 학생도 있었다.
1998년에 개봉한 SF 재난블록버스터 영화 ‘아마겟돈(Armageddon)’은 이런 시대적인 배경에서 나왔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아마겟돈’은 선과 악의 최후의 결전, 즉 ‘종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 어원은 이스라엘 북쪽의 교통요충지이면서 수천 년 전부터 치열한 전투가 여러 번 벌어졌던 거점도시인 ‘므깃도(Megiddo)’라고 한다.
미국 동부에 운석 파편이 쏟아져 뉴욕 시내가 온통 아수라장이 된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텍사스주 만한 소행성이 시속 22,000마일의 속도로 지구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게 되면 인류는 물론 박테리아까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절멸(絶滅)을 면치 못하게 된다. 남은 시간은 18일.
연일 대책회의를 하던 미국 항공우주국은 소행성 한 가운데에 800피트(약 250m) 깊이의 구멍을 뚫고 그 속에 핵폭탄을 장착하여 폭파하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게 되면 소행성은 둘로 쪼개져 지구를 양 옆으로 비껴가게 되는 것이다. 만약 표면에서 폭파하면 조각난 파편들이 지구로 쏟아져 엄청난 재앙을 맞게 된다.
미국 항공우주국은 남지나해에서 석유채굴을 하고 있는 30년 경력의 굴착전문가 해리(브루스 윌리스 扮)를 초빙하여 그의 추천으로 이 분야 최고 기술자 6인을 선발한다. 그 속에는 해리의 딸 그레이스(리브 타일러 扮)의 남자친구인 AJ(벤 애플렉 扮)도 포함되어있다. 이들은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우주비행훈련을 받고 소행성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출발 당일, 미국 대통령은 중대발표를 통해 ‘오늘 이 자리에서는 미합중국 대통령으로서가 아니라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말씀드립니다.’ 하면서 현재 지구가 처해있는 상황과 일곱 용사와 승무원들이 지구의 종말을 막기 위해 인류의 운명을 짊어지고 우주로 떠나게 되었음을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이들 용사들을 나누어 태운 자유호와 독립호가 하늘로 오른다. 한 시간 후, 두 우주선은 러시아 우주정거장에 도킹하여 연료보급을 받는다. 그런데 러시아 우주정거장의 중간밸브 손잡이가 부러지면서 연료가 누출되는 바람에 우주정거장이 불에 타 폭발하는데, AJ와 러시아 우주인은 폭발 직전에 가까스로 독립호에 편승한다. 두 우주선은 달의 뒤편을 지나 목표물인 소행성 가까이 접근한다. 이때 운석의 파편과 충돌한 독립호는 소행성으로 추락하고 만다.
자유호에 탄 해리 일행은 소행성에 착륙하자마자 바로 굴착작업을 시작한다. 남은 시간은 8시간뿐. 이곳 지형이 철광석으로 되어있어 드릴의 날이 부러지지는 등 굴착작업은 계속 난관에 봉착하고, 굴착차인 아르마딜로마저 고장 나는 바람에 더 이상 굴착작업을 할 수 없게 된다. 마침내 이 소식이 전해지고 지구의 운명이 몇 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는 절망적인 뉴스가 전 세계에 타전된다.
이때, 추락한 독립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AJ와 두 대원이 아르마딜로를 몰고 온다. 다시 굴착작업이 재개되고 천신만고 끝에 지하 800피트 지점에 핵폭탄이 설치된다. 그러나 무선 폭파장치가 고장 나는 바람에 누군가 이곳에 남아서 손으로 스위치를 눌러야 한다. 이들은 제비뽑기를 해서 한 사람이 남기로 하는데, AJ가 뽑힌다.
해리는 자신이 소행성에 남기로 결심하고, 지구로 귀환하는 자유호에 AJ를 억지로 타게 한다. 그리고 ‘널 언제나 내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었어. 내 딸 잘 부탁한다. 그레이스와 결혼하게 돼서 정말 기뻐. 사랑한다. 아들아.’ 하고 말한다. 해리가 핵폭탄 스위치를 눌러 지구를 구하고, 지구로 귀환한 AJ가 그레이스와 결혼식을 올리면서 영화가 끝난다.
재난영화의 최고봉으로 마이클 베이 감독의 ‘아마겟돈’을 꼽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아마도 이 영화가 각본의 짜임새가 뛰어나고, SF, 액션, 멜로, 가족 등 여러 가지 장르가 망라되어 있어서 인류애를 담은 범지구적인 오락영화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리라. 또 1990년대 영화치고는 괜찮은 수준의 CG도 톡톡히 한 몫을 했다. 군데군데 작위적인 위기 설정이 너무 많고, 결말이 너무 빤하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아마겟돈’은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미미 레더 감독의 ‘딥 임팩트(Deep Impact)’와 비교가 되곤 한다. ‘딥 임팩트’ 역시 소행성과 지구의 충돌을 다루고 있는데, 여성감독 특유의 탄탄한 내러티브 구조와 심리 표현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한 순간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볼거리가 풍부한 ‘아마겟돈’의 손을 들어주었다. 서울관객을 기준으로 ‘아마겟돈’은 117만 명, ‘딥 임팩트’는 64만 명을 기록했다.
‘아마겟돈’의 미국최고주의와 영웅주의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미국의 일개 민간인이 발견하는 소행성을 다른 나라에서는 지구 코앞에 올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또 미국의 독수리7형제(?)가 지구를 구할 때까지 전 인류가 무작정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설정도 마찬가지이다. 기껏 타국을 배려한 것이 러시아의 노후한 우주정거장에서 급유를 받는 것이니…. 그러나 흥분할 것은 없다.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다.
초반에, 기름쟁이(?)한테는 딸을 주지 않겠다며 AJ를 남자친구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버지에게 바락바락 대들던 그레이스, 우주로 떠나는 아버지에게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라더니 ‘오시는 길에 제 남자친구도 챙겨와 주실래요?’ 하고 애교어린 부탁을 하는 장면을 보고 ‘딸 키워 봐야 아무 소용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해리가 딸 그레이스와 마지막으로 영상통화를 할 때 ‘돌아간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구나. 너와 신부행진을 꼭 하고 싶었는데….’ 하는 장면은 아비로서의 진솔한 심정이 느껴져 애틋하고 가슴 아팠다. 또 그가 폭파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그의 뇌리에 딸의 어린 시절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장면도 찡하게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