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제목이 괜찮은 영화는 내용도 틀림없이 괜찮다.’
오랫동안 지녀온 필자의 편견 중의 하나이다. 이 편견에도 잘 부합하고, 각각 46만, 58만이라는,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흥행기록을 세운 방화(邦畵)에 최인호 원작의 ‘별들의 고향’(1974년)과 조해일 원작의 ‘겨울여자’(1977년)가 있다.
둘 다 당시의 인기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각각 ‘경아’와 ‘이화’라는 7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상의 전형을 창조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겨울여자’의 흥행기록은 80년대에도 깨지지 않았고, 90년대에 들어와서야 ‘장군의 아들’(1990년)이 60만을 돌파함으로써 깨지게 되었다. 그 후 ‘서편제’(1993년)가 100만을 돌파하더니, 최근에는 1,000만을 돌파한 영화도 여럿 생겨났다.
두 영화가 모두 여주인공의 남성편력을 기둥 줄거리로 한 구성이라는 점, 여주인공이 둘 다 첫사랑의 실패를 안고 출발한다는 점 등에서 유사성을 지니고 있지만, 작가의 인생관 내지는 가치관의 구현이라 할 수 있는 종국(終局)의 행로는 판이하게 나타난다.
경아(안인숙 扮)가 첫사랑의 상처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밤거리의 여자가 되어 방황하다가 눈 속에서 쓰러져 죽는데 비해, 이화(장미희 扮)는 첫사랑의 상처를 이겨내고 꿋꿋이 일어나 자기선택의 길을 걸어간다. 경아가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환상을 쫓는 자아상실형의 여자라면, 이화는 세속의 정조관념을 과감히 깨부수는 자아실현형의 여자라고 할 수 있다. 하룻밤만 품으라면 경아를, 아예 한 쪽을 잡으라면 이화를 택하고 싶어지리라.
얼마 전에 케이블TV에서 방영하는 ‘겨울여자’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 영화의 한 장면에서 ‘오무라이스 400원’이라고 쓰인 메뉴판을 보고 대학생이었던 그 시절에 대한 감회가 새로웠다. 오늘은 그 시대의 깨어있던 여자 이화를 만나보자.
이 영화는 중산층 목사의 딸인 주인공 ‘유이화’가 대학에 입학하는 시점에서부터 졸업하는 시점까지 세 남자를 겪으면서 여자로서 자아와 성(性)에 눈떠 가는 과정을 그렸다. 등장하는 세 남자는 이러하다.
i) 부잣집 외동아들로서 극도로 내성적인 남자
ii) 대학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이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는 전형적인 대학생
iii) 대학 강단에 나가는 이혼한 중년남자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 이화가 대학입시 발표장에서 자신에게 연애편지를 보내오던 첫 번째 남자를 만나고, 어느 날 그 남자를 따라 별장에 간다. 거기서 그 남자가 자신을 안으려고 하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뛰쳐나온다. 그 남자는 충격을 받아 자해(自害), 죽고 만다.
그 죄책감 때문에, 이화는 자신을 원하는 남자가 있으면 미련 없이 자신을 던지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런 이화 앞에 70년대 대학생의 전형이랄 수 있는 두 번째 남자(김추련 扮)가 나타난다. 더벅머리에 잠바 차림이고, 호주머니는 늘 비어 있지만 정치적 현실에 울분을 토하는 대학신문 기자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이화는 그에게 애정을 느끼고 그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이화는 처음으로 자신의 몸을 남자에게 맡긴다. 그러나 군에 입대한 그 남자는 휴가를 며칠 앞두고 사고로 뼛가루가 되어 돌아온다.
대학 졸업반이 된 이화의 세 번째 남자는 아파트에 혼자 사는 이혼남(신성일 扮)으로, 이화의 고교 때 은사(恩師)이다. 이화는 그 남자의 아파트에 찾아가 스스럼없이 옷을 벗는다. 그러나 그 남자의 청혼은 거절하고, 이혼한 부인을 찾아가서 다시 맺어주고는 혼자 한강변을 걷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뒤이어 나온 ‘겨울여자 2편’에서는 이화가 대학을 졸업하고 잡지사 기자생활을 하는 소설의 후반부를 다루고 있다. 집에서 정혼한 남자를 거부하고, 취재 일로 알게 되어 함께 불우아동을 뒷바라지해 온 마지막 남자를 찾아가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2편에서는 다른 배우가 이화로 나오는 데다, 두 번째 남자가 다시 살아나 마지막 남자로 나오는 바람에 김샜고, 내용도 무슨 불우아동돕기용 계몽영화 같았다. 일단 2편을 논외로 하고, 이화의 남성편력을 성적(性的) 측면에서 정리해 보자.
첫 번째 남자를 만날 때만 해도 남자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행위조차도 용인하지 못할 정도로 숙맥이었다.
두 번째 남자에게는 아무런 고민 없이 자신이 고이 간직해 온 처녀를 맡긴다. 두 번째 남자와 여행을 떠났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의 아버지가 그 동안 어디서 무얼 했느냐고 묻자, ‘제가 원하지 않은 일은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버지.’ 하고 대답한다. 명쾌한 자기논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다.
세 번째 남자는 오히려 이화가 유혹하였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갈래요, 선생님.’ 하며 화장실로 가 옷을 훌훌 벗고 샤워를 하는 이화. 요즘의 시점에서 보면 여대생의 이런 행각이 별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시는 70년대였다. 이때만 해도 문학은 시대를 앞서 있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한 발 앞서 세태를 예견해 주었다. 이 영화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처녀성 터부에 적극적으로 대항한 이화의 명쾌한 자기선택의 애정관에 있다.
요즈음,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모텔, 이른바 러브호텔에는 자가용을 타고 와서 재미도 보고 돈도 버는 여대생이 꽤 많다고 한다. 처녀성 터부는 이제 도저히 소설의 주제가 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요즈음 소설가에 의해 창조되고 있는 인간상은 이미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제 소설가의 상상력은 더 이상 세태를 예견하기는커녕, 시대의 변천 속도를 따라가지도 못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이 시대를 대변해 주는 여성상의 이름이 쉬 떠오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30년대, 이광수의 소설 ‘사랑’에 나오는 ‘석순옥’ 같은 헌신적인 여성상은 이미 고전 속에 화석화(化石化)되어 버렸고, 50년대,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의 여주인공 ‘오선영’은 취업을 기화로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춤과 연애에 빠짐으로써 머지않아 다가올 성문화에 대한 인식 변화를 예고해주었다.
70년대에 사랑을 받았던 우리의 연인 ‘이화’ 역시 시대를 함께 했던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오래 기억에 남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벌써 21세기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