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나름대로는 깐깐하다고 자부하는 내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별 다섯 개를 주었던 영화가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만들어졌지만 대학생이 되어서야 본 영화, 약 2백년 전에 스페인에서 일어난 영불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펼쳐진 한 군인과 수녀의 로맨스를 다룬 어빙 래퍼 감독의 1959년 작 ‘기적(The Miracle)’이다.
금서(禁書)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다가 원장수녀에게 혼이 나기도 하는, 아직 서약을 하지 않은 수련수녀 테레사가 주인공이다. 영화 ‘자이언트’(1956년)에서 석유재벌이 된 제임스 딘에게 꼬리를 치던 주인집 딸 캐롤 베이커가 그 역을 맡았다. 남자주인공은 멋진 영국군 장교복을 입고 백마를 타고 나타난 마이클로, 007영화에서 터프하면서도 섹시한 매력을 물씬 풍기는 제임스 본드 역을 맡기 훨씬 전, 풋풋한 꽃미남 시절의 로저 무어이다.
또 한 사람, 수녀원의 성모마리아상을 빼놓을 수 없으리라. 이곳 주민들이 모두 이 성모상 덕분에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으니 어쩌면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기적을 행하는 성모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1810년, 프랑스의 나폴레옹군과 맞서기 위해 스페인에 도착한 영국군은 마드리드 인근의 한 수녀원 옆을 지나간다. 이 모습을 구경하던 수련수녀 테레사는 말에 물을 주려고 잠시 멈춰선 마이클 대위와 눈이 마주치자 그에게 온통 마음을 뺏기고 만다.
큰 전투가 벌어지고, 곧이어 수녀원은 영국군 부상자들을 수용하게 된다. 테레사는 자신이 간호하던, 가슴에 총을 맞고 사경을 헤매는 환자가 마이클임을 알게 되자, 성모상 앞에서 간절히 기도한다. 마이클을 낫게 해주면 성모님의 충실한 종이 되겠노라며.
기적처럼 마이클은 완쾌된다. 다시 전장(戰場)으로 떠나게 된 마이클은 테레사에게 결혼하자고 한다. 테레사가 망설이자, 한 로마 철학자가 남긴 유명한 격언을 들려준다.
‘To love is within our power. But it’s not enough power to stop loving.’ 직역하면 ‘사랑을 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 안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을 멈추게 할 만큼 충분한 능력은 아니다.’는 뜻이고, 의역하면 ‘사랑의 시작은 인간이 하지만, 그것을 멈추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뜨거운 입맞춤을 나누고 마이클이 떠나가자, 그날 밤 테레사는 성모상 앞에 엎드려서 성모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호소하고 수녀복을 벗어던지며 뛰쳐나간다. 그러자 성모상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자리에서 나와 테레사 수녀로 현신(現身)한다.
마이클을 찾아 나선 테레사는 프랑스군 잔당에게 잡혀 겁탈당할 처지에 놓이지만 용맹스런 집시부인의 도움을 받아 위기에서 벗어난다. 갈 데가 없어진 테레사는 집시부인을 따라가는데, 그 집 아들이 마이클의 시계를 갖고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로부터 영국군 장교의 시체에서 시계를 빼왔다는 말을 듣고 억장이 무너지는 테레사.
아무런 희망이 없어진 테레사는 열렬히 구애하는 두 아들 중에서 큰아들과 결혼하기로 한다. 이를 질투한 작은아들이 현상수배자인 형을 밀고하는 바람에 큰아들은 수색대의 총에 맞아 죽는다. 테레사를 내보낸 집시부인은 ‘내게는 아들이 없다.’며 작은아들마저 내쫓는다. 그가 테레사를 뒤쫓아 가자, 집시부인은 소총을 겨눠 작은아들을 쏘아 죽인다.
우여곡절 끝에 유명 오페라의 프리마 돈나가 된 테레사는 다시 한 귀족 투우사를 만나게 된다. 열정적으로 다가오던 그가 투우경기 중 사고로 죽게 되자, 테레사는 자신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는 모두 죽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유럽의 대도시를 돌며 순회공연을 하던 테레사는 어느 날 시가행진을 하는 군인들을 보다가 갑자기 얼어붙고 만다. 맨 앞에서 말을 타고 오는 장교가 죽은 줄 알았던 마이클이었던 것이다. 테레사가 ‘마이클-’ 하고 부를 때, 온몸에 짜르르 하는 전율을 느꼈었다. 이때 함께 영화를 보던, 단체관람 온 여학생들이 일제히 괴성을 지르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마이클은 수녀원으로 테레사를 찾아간 얘기를 들려준다. 성모상은 없어지고 범접할 수 없는 신심(信心)으로 가득 찬 테레사의 모습을 보고 발길을 돌렸단다. 곧 작전에 투입되어 적진으로 떠나야 하는 마이클은 이제 절대로 헤어지지 않겠다며 결혼식을 올리자고 한다. 테레사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죽었다면서 고개를 가로젓는다.
수녀원을 떠난 후 처음으로 가까운 성당을 찾아간 테레사는 간절히 기도하면서 약속을 한다. 마이클이 전장에서 무사히 돌아오면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가겠노라고.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다. 프랑스군과의 전투에 출전한 마이클이 바로 옆에 떨어진 포탄에 맞아 쓰러졌는데도 멀쩡하게 일어난 것이다. 망원경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령관은 ‘믿을 수 없군, 기적이야!’ 하며 감탄한다.
마이클이 돌아오자, ‘저를 찾지 마세요. 마음 편하게 떠나게 해주세요.’라고 쓰인 테레사의 눈물 젖은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테레사는 수녀원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오른다. 여기서 마지막 기적이 일어난다. 테레사가 떠난 후 4년 동안 지독한 가뭄으로 농작물은 말라죽고 가축들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마을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메마른 대지가 촉촉이 젖어들고 가축들은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려 목을 축인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돌아온 테레사가 성모상이 있던 자리 앞에 엎드리자 테레사를 대신하던 성모님(?)이 조각상으로 되돌아간다. 다시 돌아온 테레사와 함께 수녀들이 모여 성가(聖歌)를 합창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이 작품은 종교영화라기보다는 청년장교와 세속적인 사랑에 빠진 한 수녀가 숱한 우여곡절 끝에 성모의 품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녀 취향의 순애보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며칠 동안 장면 하나하나를 되새기면서 가슴앓이를 했다. 애절한 사랑이 비껴가는 아픔 때문에.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때 이런 결심을 했었다.
‘그래, 언젠가 종교를 갖게 된다면, 이왕이면 젊고 예쁜 성모상이 있는 성당에 나가자. 가끔 기적을 내려주실 지도 모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