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키 178cm, 호리호리한 몸매에 조각 같은 이목구비를 지닌 프랑스 배우 ‘아랑 드롱’. 그의 이름은 1960년대부터 거의 40여 년간 고유명사의 영역을 넘어 잘생긴 남자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의 외모는 남자가 봐도 완벽 그 자체이니 여자들이 그에게 느꼈을 감정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 남부 한 소도시의 결손가정에서 태어난 아랑 드롱은 어린 시절부터 고생을 많이 했고, 학교생활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고 한다. 방황하던 그는 열여덟 살 때 자원입대하여 베트남에서 공수부대원으로 복무를 하였다. 제대 후 시장 짐꾼(porter)과 술집 웨이터 생활을 전전하던 중, 당시 인기 절정의 청춘배우 제임스 딘의 사망으로(1955년) 할리우드가 충격에 빠져있을 때 관계자의 눈에 띄어 영화계에 발을 딛게 되었다(1957년).
아랑 드롱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영화는 그의 여섯 번째 출연작인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이다. ‘금지된 장난’(1952년)으로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0년 작으로, 아랑 드롱의 이름과 함께 오래오래 기억될 명화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음악은 이탈리아 출신의 니노 로타가 맡았는데, 실로폰, 바이올린, 색소폰, 피아노 등 여러 악기 연주로 선보이고 있는 주제곡은 동서양을 아우르는 음률이라는 평을 받으며 영화 못지않게 명성을 얻었다. 당시 25세였던 아랑 드롱은 야망을 위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악한으로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숨에 전 세계의 여심을 사로잡는 스타로 발돋움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던 톰 리플리(아랑 드롱 扮)는 이탈리아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고교동창 필립(모리스 로네 扮)을 데려오면 5,000달러(지금 가치로 약 10만 달러)를 주겠다는 필립의 아버지의 제안을 받고 이탈리아로 향한다.
그러나 나폴리에서 만난 필립은 도무지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고 애인 마르쥬(마리 라포레 扮)와 함께 요트여행을 하는데 따라가자고 한다. 셋이서 떠난 지중해 요트여행에서, 필립은 톰을 마치 하인 대하듯 한다. 마르쥬가 하선(下船)하고, 필립에 대한 콤플렉스와 질투가 증오로 변한 톰은 급기야 요트 위에서 필립을 살해하고 만다.
톰은 죽은 필립 행세를 하며 서명을 위조하여 필립의 예금을 인출하고, 요트를 매물로 내놓고, 또 필립이 쓰던 타자기로 마르쥬에게 편지를 쓰는 등 주도면밀하게 사기행각을 벌인다. 이때 숙소로 찾아온 필립의 친구 프레디가 눈치를 채자 그마저 살해한다. 톰은 필립이 프레디를 죽이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한 후, 짝사랑하던 마르쥬에게 접근하여 그녀의 사랑을 얻는 데도 성공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관객들은 악한의 편이 되어간다. 악한이 워낙 미남이라서 그런 건지 그의 처지가 딱해서 그런 건지…. 톰이 완전범죄를 이룬 승리감에 젖어 해변의 식당 의자에 앉아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고 있을 때, 요트를 인양하는 포구에서는 바다 속에 던져 넣은 필립의 시체를 묶은 줄이 스크루에 걸린 채 딸려 올라온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극적인 반전이다.
톰을 체포하러 온 경찰의 요청을 받은 식당 여주인이 ‘리플리 씨, 전화 왔어요.’라고 하자, 마르쥬의 전화로 착각한 톰이 의자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고, 그 뒤로 바닷가의 전경을 비추는 마지막 장면이 오래도록 스크린에 머문다.
쪽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지중해와 고풍스런 나폴리 근교의 마을 풍광은 50년이 지난 후에 봐도 여전히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영화는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강렬하면서도 아련하게 다가오는 주제 음악과 함께, 인간의 탐욕과 이중성을 시시각각 긴박하게 흘러가는 스토리에 담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르네 클레망은 당시 프랑스의 젊은 감독들이 일으킨 새로운 물결인 누벨바그(Nouvelle Vague)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었는데, 이 ‘태양은 가득히’가 누벨바그 영화로 자리매김 되자 매우 의아해 했다고 한다. 기존 방식을 과감히 탈피한 비약적인 전개나 장면 묘사의 파격 등을 보면 가히 누벨바그의 주류라 할 만하다.
아랑 드롱은 목소리도 매력적이어서 음반도 여러 장 냈다. 그 중에서 그와 가수 달리다(Dalida)가 함께 부른 감미로운 음률의 ‘빠로레 빠로레(Paroles, Paroles, 달콤한 속삭임)’는 요즘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유명한 곡이다. 마르쥬 역을 맡은 마리 라포레도 ‘태양은 가득히’의 주제곡을 음반으로 발표하는 등 한 때 가수활동을 했다.
이 영화의 원작은 미국 출신의 여류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가 1955년에 발표한 ‘재주꾼 리플리 씨(The Talented Mr. Ripley)’인데,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완전범죄를 꿈꾸는 한 젊은이의 행각을 드라마틱하게 그려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이 작품 이후 ‘Mr. Ripley, Under Ground’와 ‘Mr. Ripley, Under Water’ 등을 발표, 모두 5편의 ‘Mr. Ripley’ 시리즈를 출간하였다. 그 여파로 ‘리플리 증후군’이란 신조어도 생겨났다.
원작소설에서는 영화와는 달리 톰의 완전범죄로 끝나는데, 아마도 속편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리라. 영화도 이 정도 성공했으면 속편 제작을 생각해봤을 법도 한데, 르네 클레망 감독은 아예 그런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9년에 나온 ‘리플리’는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이지 속편은 아니다.
아랑 드롱은 ‘태양은 가득히’ 이후 40여 년 동안 청춘영화, 갱영화 등 총 9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아울러 제작과 연출도 하고 각본도 직접 쓰는 등 만능영화인으로 활약했다. ‘태양은 외로워’(1962년), ‘아듀 라미’(1968년), ‘시실리안’(1969년), ‘볼사리노’(1970년), ‘조로’(1975년) ….
전 세계 여성들의 우상이었던 아랑 드롱,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와 5년간 동거를 했고, 나탈리 드롱을 비롯한 세 명의 부인들과 살다가 차례로 이혼하여 지금은 젊은 모델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지난번 칸 영화제 시상대에 선 그의 모습을 TV에서 보았는데, 늙어서도 여전히 멋진 노신사의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한 시대를 미남의 대명사로, 청춘의 우상으로 살아온 그가 자신의 대표작인 이 영화를 지금 다시 보면 어떤 생각이 들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