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물러진 홍시의 추억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15:26

본문

 

물러진 홍시의 추억

 

최용현(수필가)

 

   2학년에 복학한 후 처음 맞은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2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방학 때 쓴 콩트 하나를 미니사이즈의 한 인기 잡지에 투고했다. 한 달쯤 지났을까. 그 글이 채택되어 심사평과 함께 10월호에 실렸다는 연락이 왔다. 10월호가 발행되자 하숙집으로 편지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10월 중순부터 한 보름 정도 그랬던 것 같다. 적게 올 때는 하루에 5~10, 많이 올 때는 하루에 15~20통 정도가 왔다. 하숙집 아줌마가 갑자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제가 쓴 글이 잡지에 실렸는데, 그걸 보고 팬레터가 오는 거예요.’ 하고 말씀드리고 잡지를 보여드렸다.

   그 글의 제목은 일등병 유감이었다. 한 군인이 일등병 때 휴가 가서 만난 아가씨에게 첫 휴가라 하지 않고 마지막 휴가 중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그 아가씨가 부대로 면회를 오는 바람에 일등병임이 들통 나고, 이에 화가 난 아가씨가 그냥 돌아가 버린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군대생활 할 때 휴가 나와서 겪었던 일을 재미있게 꾸며본 콩트였다. 그러다보니 필자의 신분이 갓 제대한 복학생임이 드러났고, 이에 전국 각지에서 아가씨들이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저녁마다 같이 하숙하던 학생들이 내 방에 모여서 그 편지들을 읽었는데, 같은 서울에서는 물론이고 부산 대구 광주 등 대도시에서 온 편지가 많았다. 꼭 답장을 해달라며 자신의 사진을 넣어서 보낸 아가씨도 있었고, 세 들어 살면서 주인집의 전화번호를 적어 보낸 아가씨도 있었다. 어떤 편지는 옆방 하숙생이 자기가 연락한다며 들고 가기도 했다.

   그런데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편지가 한 통 있었는데, 그것은 내 고향과 면까지 같은 곳에서 온 한 통의 편지였다. 우리 동네와는 좀 떨어져 있어서 출신 초등학교는 달랐지만 상당히 가까운 곳이었다. 그 아가씨는 내 이름을 보고 혹시 자신이 아는 고향사람인가 싶어서 편지를 보냈단다. 그런데 나는 그 아가씨의 이름을 봐도 도무지 누군지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그곳이 고향이 맞으며, 겨울방학 때 내려가면 꼭 연락하겠다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며칠 만에 답장이 왔다. 나는 방학 때 고향집에 내려가서 전화를 걸었다.

   읍내 다방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가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나와 비슷한 20대 중반으로 보였고, 커트머리에 약간 갸름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우리가 본 적이 있다면 틀림없이 내가 자전거 통학을 하던 중학교 시절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내가 부산으로 진학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얼핏 얼굴을 보았을지도 모를 여학생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녀가 중학교 때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셨어요?’ 하고 물었다. 내가 . 맞아요.’ 하고 대답하자, 그녀가 누군지 알 것 같다면서 옛날이야기 하나를 풀어놓았다.

   “중학교 2학년 때 가을이었어요. 그때는 매일 10리쯤 되는 통학 길을 걸어 다녔어요. 하교 길에 친구들과 함께 걷고 있는데, 신촌마을 좀 못 왔을 때 뒤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던 남학생 셋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갑자기 뇌리를 스쳐가는 추억이 하나 떠올랐다. 그녀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싶었으나 애써 참았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좇아 기억을 따라갔다.

   중학교 3학년 때 가을이었다. 하교 길에 두 친구와 함께 셋이서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는데 신촌마을 저 앞에 M여중 교복을 입은 여학생 셋이서 걸어가고 있었다. 마침 길옆 퇴비더미에 너무 익어서 물러진 홍시가 버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를 보고 장난 끼가 발동한 우리는 홍시 한 개씩을 주워서 여학생들에게 던지기로 했다.

   나는 중간에 있는 키 큰 여학생을 맡았다. 홍시 하나씩을 손에 든 우리는 살금살금 페달을 밟으며 여학생들 뒤로 다가가 서로 눈짓을 하며 동시에 홍시를 던졌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이 던진 홍시는 모두 목표물(?)을 벗어났는데 내가 던진 홍시는 중간에 있던 여학생의 등에 정확히 맞았다.

   ‘엄마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논으로 뛰어드는 여학생들을 뒤로하고 세 악동은 죽어라고 페달을 밟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두 친구는 일부러 살짝 비켜서 옆으로 던졌는데, 나만 순진하게 똑바로 던졌던 것이다. 그 여학생을 얼핏 보니 얼굴이 약간 갸름했다.

   그 뒤로도 등하굣길에 그 여학생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여학생의 하얀 교복 블라우스의 등 부분에는 거무스레한 감물 자국이 있었다. 나는 그 옷만 보이면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서 부리나케 페달을 밟아 도망치곤 했고, 이야기를 전해들은 친구들이 저 여학생은 너한테 찍혔으니 이제 니꺼다.’고 놀려대곤 했다.

   하얀 교복을 입은 여중생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 위에 겹쳐졌다. 앞에 앉아있는 그녀가 바로 내가 던진 홍시에 맞았던 바로 그 여학생이었던 것이다.

   “, 맞아요. 제가 그랬어요. 정말 아찔한 추억입니다. 살짝 옆으로 던졌어야 했는데, 그땐 정말 순진했었나 봐요.”

   내가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그날 아버지한테 혼이 났다고 했다. 평소에 어떻게 하고 다녔기에 남학생들이 그렇게 했겠느냐며. 홍시 자국을 씻으면서 너무 억울해서 펑펑 울었단다.

   그 후, 내게 홍시를 던진 학생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해서 그 중학교에 다니는 초등학교 친구와 선배들을 통해 알아봤더니 부산으로 진학했다고 하더란다. 그때 내 이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요즘도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는 학생들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나곤 한단다.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잡지에 실린 그 글을 보면서 이름이 낯설지 않아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편지를 썼어요. 답장에 고향이 이곳이라고 했을 때 저는 그 학생임을 확신했어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네요.”

   바깥에 서서히 어둠이 깔릴 무렵,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함께 다방을 나서고 있었다.*

 

'에세이 및 콩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 입사시험에서  (0) 2018.12.22
두 여자(1)  (0) 2018.12.22
햄릿과 돈키호테  (0) 2018.12.22
어이구, 이 병신  (0) 2018.12.22
서예동아리 들어가기  (0) 2018.12.22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