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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과 돈키호테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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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과 돈키호테

 

최용현(수필가)

 

   하숙집에서 저녁을 먹고 여느 때처럼 학교 도서관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옆방의 4학년생 강병욱 씨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손 형, 오늘은 도서관에 가지 말고 나랑 소주나 한잔 합시다.”

   그가 들어서자 술 냄새가 확 풍겨왔다. 그의 손에는 소주 한 병과 구운 오징어 한 마리가 들려져 있었다. 거의 일 년 동안 한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지만 그가 초저녁에 술을 마시고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오늘따라 웬일인가 싶어 나는 도서관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손 형,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오늘은 손 형한테 모두 털어놓고 자문을 좀 구해야겠소. 날 못난 놈이라고 욕해도 좋소.”

   그는 얘기를 꺼내기가 무척 힘이 드는 듯 소주잔을 연거푸 몇 번 들이키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강병욱 씨가 술기운을 빌어 털어놓은 얘기는 대강 이러했다.

   지난봄에 우리 하숙집 바로 옆집에 묘령의 아가씨가 새로 들어왔는데, 한 마디로 그 아가씨한테 첫눈에 반했단다. 그 집 초등학생 아들에게 물어 알아보니 옆집 아주머니의 막내 여동생인데 무슨 학원에 다니려고 언니 집에 온 것이란다.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오후, 배드민턴 공 하나가 하숙집 마당으로 날아들었고, 곧이어 그 아가씨가 대문으로 들어왔다. 그가 공을 주워서 그 아가씨의 손에 건네주는 순간 온몸에 짜르르 하는 전기가 왔고, 그때부터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도서관에 가도 책에 있는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아가씨에게 마음을 뺏겨버린 것이다.

   여름방학 때 다른 하숙생들이 모두 고향으로 내려간 뒤에도 그는 혼자 하숙집에 남아 있었는데 취직 준비는 핑계였고 사실은 그 아가씨 때문이었단다. 요사이 하숙방 창문 너머로 그 집을 기웃거리는 버릇이 생겼고, 하루라도 그녀를 보지 못한 날은 종일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밤늦게 하숙방으로 들어왔다가 약간 열려진 창문 틈 사이로 그녀가 세면장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 모습을 훔쳐보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녀의 환영(幻影)에 사로잡혀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쩌다가 집 앞에서 그녀와 마주치면 인사를 건네기는커녕, 도무지 얼굴이 화끈거려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앞 골목에서 그녀와 자주 배드민턴을 치던 그 집의 초등학생 아들이 집 앞에서 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아이를 완구점에 데려가서 비싼 조립용품을 하나 사주고 드디어 그녀의 이름과 나이, 전화번호를 알아내는데 성공했다.

   ‘조영희. 22. 2266-87×3’

   그날 그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고민을 했다. 처음엔 편지를 보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옆집끼리 무슨 편지냐 싶어서 포기하고, 직접 전화를 걸어 부딪쳐보기로 했다. 이야기가 잘 되면 학교 앞에 있는 카페로 나오라고 해야지.

   다음날 저녁, 그녀가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골목길 입구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금방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 말도 못하고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고 말았다. 밤새도록 연습을 했건만 도무지 목구멍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뒤부터 그녀가 집 앞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으면 왠지 그녀가 자신이 전화한 것을 아는 것만 같아 황급히 하숙방으로 뛰어 들어오고 만단다. 그는 요즘도 온통 그 아가씨에게 마음을 다 뺏기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단다.

   “손 형, 어떡하면 좋소?”

   그 아가씨는 나도 집 앞에서 초등학생과 배드민턴 치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상당히 예쁜 얼굴에 키도 적당하고 몸매도 괜찮은 여자였던 것 같다.

   “걱정 마시오. 나한테 맡겨주시오.”

   나는 우선 강병욱 씨를 안심시키고, 그 집 전화번호를 받아서 바로 마루에 나가 전화를 걸었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바로 옆집이라서 그런지 목소리가 육성으로 들리는 듯 했다. 나는 옆집 하숙생이라고 신분을 밝히고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지금 바로 옥상에서 만나고 싶다고 했다.

   이곳의 주택들은 옥상의 끝이 거의 맞붙어 있어서 어렵지 않게 건너갈 수 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10분 후에 올라갈게요.’ 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분한 말투였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 당황한 기색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10분 후에 옥상에 올라갔다. 반달이 동그마니 떠있었다. 좀 있으니 저쪽 옥상에서 실루엣이 보이는가 싶더니 곧 바로 그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자 그녀도 안녕하세요.’ 하며 사뿐사뿐 이쪽으로 걸어왔다. 향긋한 비누냄새가 코끝에 와 닿았다.

   아까 전화로 이 집 하숙생이라고 내 소개를 했으므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강병욱 씨한테서 들었던 얘기 중에서 샤워 때 훔쳐본 것만 빼고 거의 다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성격은 좀 내성적이지만 괜찮은 사람이라며 사귀어보라고 했다. 그녀는 몹시 놀라는 것 같았고 어느 학생인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녀가 좀 생각해보고 연락하겠다며 하숙집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그러지 말고 이따가 10시에 강병욱 씨를 옥상에 올려 보낼 테니 직접 만나보라고 했다. 그리고 약속의 증표로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달라고 했다. 강병욱 씨가 가지고 올라가게 하겠다고.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결심이 선 듯 손목시계를 끌러주었다.

   나는 내려오자마자 강병욱 씨에게 시계를 건네주며 10시에 옥상에 올라가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만날 때 할 얘기 등 이것저것 조언을 해주고 있는 사이, 마루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하는 생각에 뛰어나가 전화를 받으니 역시 짐작대로 그녀였다. 그녀도 내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까 옥상에서 만났던 분이죠? 생각해 보았는데 그분은 만나고 싶지 않아요. 저는 햄릿보다는 돈키호테가 좋아요. 지금 전화 받는 분이 10시에 제 시계 가지고 올라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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