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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동아리 들어가기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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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동아리 들어가기

 

최용현(수필가)

 

   제대가 가까워지면서 붓글씨 생각이 많이 났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바로 서예동아리에 가입하지 않은 것이 못내 후회스러웠다. 그냥 차일피일 미루다 가입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었다. 그러나 아직 기회를 완전히 놓친 것은 아닐 것이다. 1학년을 마치고 입대했으니 2학년에 복학하면 아직 대학생활이 3년이나 남아있지 않은가.

   늦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빠른 순간이라는 말도 있으니 제대하고 복학하면 바로 서예동아리에 가입해야겠다. 아니다. 나이 많은 복학생이 동아리에 신입회원으로 들어가면 동아리 선배들이 싫어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상식 아닌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떡하지? 복학한 다음에 생각해보기로 하자.

   나는 누구한테서도 붓글씨를 배운 적이 없었고 서예학원에 다닌 적도 없었다. 순전히 어깨 너머로 붓글씨를 배웠다. 내가 어릴 때, 풍수지리 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자주 사랑방에 상을 펴놓고 붓글씨를 쓰셨는데, 나는 아버지가 쓰시던 벼루에 남은 먹물로 글씨를 써보곤 했다.

   그 덕분에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붓글씨 잘 쓴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드디어 5학년 때 여자 동기동창 순례와 함께 우리학교 대표로 밀양군 서예대회에 나갔다. 대회 장소는 저 유명한 영남루였다. 영남루 2층 마루에 올라가본 것도, 거기서 굽이쳐 흐르는 남천강을 내려다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군내 각 읍면에서 선발된 초등학교 대표들이 서예경연(競演)을 했다. 수십 명의 꼬마선비들이 영남루 2층 대청마루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인솔교사들은 영남루 앞마당에서 대기했다. 진행요원들이 행사요령을 설명하고 도장이 찍힌 화선지를 2장씩 나누어주었다. 제시한 문장을 제한시간 내에 한 장 써내면 된다. 나머지 한 장은 연습용이었다.

   사고가 났다. 내가 벼루를 꺼내 먹을 갈아놓고 화선지를 막 펼쳤을 때, 옆에 있던 순례가 붓을 들고 움직이다가 내 화선지 위에 먹물 한 방울을 뚝 떨어뜨린 것이다. 내 화선지는 두 장 모두 먹물이 스며들어 동전만한 자국이 생기고 말았다. 그때 화가 나서 혼자 씩씩거리다가 순례한테는 말 한 마디 못 하고 그 먹물 떨어진 화선지에 대충 써내고 나와 버렸다.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붓글씨에 대해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때는 중학생들끼리 겨루는 서예대회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있었는데 내가 까맣게 모르고 있었거나, 그 대회에 나보다 실력이 뛰어난 학우가 우리학교 대표로 출전했을 수도 있었겠다.

   부산으로 진학한 고등학교 시절에는 2학년 때 우리학교 대표로 부산시 서예대회에 나갔다가 장려상을 받았다. 그러자 담임선생님께서 한산섬 달 밝은 밤에로 시작되는 이순신 장군의 시조를 써오라고 하셨다. 며칠 동안 끙끙 앓으며 써왔더니 예쁘게 표구를 하여 우리 반 교실의 창문 쪽 벽에 걸어놓으셨다.

   그 무렵, 우리학교 사서선생님으로부터 도서관훈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벌이 꽃을 대하듯 책을 벗 삼자

   한글로 붓글씨를 써본 사람은 알리라. ‘이나 처럼 가로 획이 있는 글자는 쓰기가 좀 까다롭다. 가로 획의 위아래에 있는 자음의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글씨의 뽀대(?)가 잘 나지 않기 때문이다. 도서관 벽에 걸린, 내가 쓴 관훈 사진이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남아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서예동아리의 작품발표회에 갔다가 선배들이 쓴 다양한 서체의 작품들을 보고 내 글씨는 여기에 명함도 못 내밀겠구나.’ 하는 생각에 주눅이 좀 들었다. 물론 동아리에 가입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나도 저런 실력이 나오겠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가입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1학년을 마치고 입대를 앞둔 겨울방학 때, 고향 집에서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붓글씨를 쓴 적이 있었다. 그때 옛시조 몇 편을 써서 둘둘 말아 벽장에 넣어두었는데, 아버지가 꺼내 보시고 청산리 벽계수야로 시작되는 황진이의 시조가 맘에 드셨는지 족자로 만들어 마루 벽에 걸어놓으셨다. 휴가 때 보니 몇 군데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구나. 제대를 하면 좀 더 실력을 가다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복학수속을 밟으러 과사무실에 갔다가 우연히 같은 부대에서 복무하던 전우를 만났다. 행정학과 2학년에 함께 복학한 우리는 그날부터 단짝이 되었다. 그 친구는 잠실에 조그만 아파트를 얻어 두 동생과 함께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남동생은 D대학 4학년에, 그 아래 여동생은 우리 학교 사범대학의 가정학과 3학년에 다니고 있단다.

   어느 날, 그 친구가 사는 아파트에 갔다가 한자를 정체로 반듯하게 쓴 해서체(楷書體) 족자가 벽에 걸린 것을 보게 되었다. 한눈에 상당한 내공이 느껴지는 수준 있는 작품임을 알아보고 누가 썼느냐고 물었더니 여동생이 쓴 거란다. 여동생은 어릴 때부터 붓글씨를 배워왔고, 중고등학교 때 서예대회에서 상도 많이 받았단다. 지금도 여동생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서예동아리에서 살다시피 한단다.

   며칠 후, 그 친구와 함께 다니다가 캠퍼스에서 ROTC 제복을 입은 남학생과 손잡고 걷던 그의 여동생과 마주쳤다. 그때 여동생은 잡았던 손을 후다닥 놓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둘 다 3학년이고, 서예동아리에서 만나 사귄 캠퍼스 커플이란다. 그 남자친구가 서예동아리의 회장을 맡고 있다고 한다.

   갑자기 머릿속이 또 혼란스러웠다. 큰오빠 친구인 내가 서예동아리에 가입하면 이들 커플이 불편해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를 모른 체하고 가입하더라도, 내 보잘것없는 글씨를 이들 앞에 드러내놓는 것도 상당히 부담스럽지 않겠는가.

   서예의 기본이 평정심(平靜心)인데, 내가 이들 앞에서 마음 편히 붓글씨를 쓸 수 있을까 생각하니 더더욱 자신이 없었다. 나는 서예동아리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을 깨끗이 접었다.

   ‘그래, 혼자서 쓰자. 붓글씨는 본래 혼자서 쓰는 것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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