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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차사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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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차사

 

최용현(수필가)

 

   항우를 물리치고 중원을 제패한 유방이 한 고조로 즉위한 뒤, 초왕으로 책봉한 한신을 처형한 사실은 두고두고 후세 사가들의 시비의 대상이 되어왔다.

   책사 장량, 상국 소하와 함께 유방을 도운 삼걸(三傑)의 한 사람인 대장군 한신은 항우, 유방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할 만한 실력을 지닌 군략의 천재였다. 그러므로 통일된 후에는 한신의 실력과 위치가 유방에게 위협으로 느껴지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반역을 꾀한다는 죄목으로 포박 당한 한신은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약은 토끼가 죽고 나니 공을 세운 사냥개는 쓸모없다 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는구나(狡兎死良狗烹).’

   아울러 함께 건국을 도운 무장으로 각각 왕으로 봉해졌던 팽월과 영포 등도 결국 한신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수년 전, 국회의장을 지낸 모씨가 사정의 칼을 맞고 쫓겨날 때 썼던 유명한 말 토사구팽(兎死狗烹)’은 한신이 남긴 이 말을 다시 인용한 것이다.

   유방의 공신에 대한 처사는 각박하다 못해 잔인하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에게는 천하의 질서를 유지할 의무가 주어지므로 패권에 도전하는 사람은 단호히 처단하는 것은 패자(覇者)의 책무가 아니겠는가.

   한 고조로 즉위한 유방으로서는 태자로 책봉된 아들이 총기가 없고 유약한 데다, 개국공신들이 왕으로 봉해져 임지에서 분에 넘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유 씨의 백년대계가 두려웠다. 그러므로 제실을 넘볼만한 공신들을 미리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4백 년 동안 한 제국이 융성했던 것은 이때 악역을 마다 않고 창업기반을 공고히 해둔 유방의 정치수완 덕분임은 결코 부인할 수 없으리라.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에게도 개국공신의 발호를 억눌러야 하는 소임이 주어졌으나, 그는 오히려 개국공신들의 부추김을 받아 후처 소생의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했다. 다른 왕자들이 불만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왕자의 난과 양위(讓位), 태조와 태종 부자간의 갈등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여기서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글을 읽거나 쓰다보면 고사성어를 자주 대하게 되는데, 이들 고사가 한결같이 중국 고대사의 에피소드에서 나온 것들이어서 자존심이 상하곤 했었다. 함흥차사는 두문불출 등과 함께 순수 국산품이라는 점에서 애착을 느끼게 된다. 조선조 창업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불행한 역사를 더듬어 보면서, 함흥차사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에게는 두 부인이 있었다. 한 씨 부인에게서 다섯 아들(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이 있었고, 강 씨 부인에게서 두 아들(방번, 방석)이 있었다. 한 씨 부인은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강 씨 부인이 왕후가 되었다.

   이성계는 개국공신인 정도전 등과 의논, 강 씨 부인의 소생인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가장 걸출한 왕자인 5남 방원이 난을 일으켜 개국공신인 정도전과 남은, 세자인 방석, 방번 등 이복동생을 죽였다(1차 왕자의 난).

   방원의 천거로 차남 방과가 세자가 되었다. 이성계는 아들들이 정권다툼으로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껴 세자에게 임금 자리를 넘겨주고 물러났다.

   왕이 된 방과(정종)에겐 정실 소생의 아들이 없었다. 세 동생 중에서 세제(世弟)가 정해지게 되었다. 4남인 방간과 5남인 방원 사이에 또 싸움이 벌어졌다(2차 왕자의 난). 승리한 방원은 세제로 봉해졌고 방간은 귀양을 갔다. 동생 덕분에 임금이 되었던 정종은 불안하여 세제에게 임금 자리를 내주고 물러났다.

   이를 본 이성계는 아들들(특히 방원)에게 더욱 증오심을 느끼고 강원도 오대산 절에 들어가 버렸다. 얼마 후 고향인 함흥으로 가서 아예 눌러 살며 울적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방원은 임금(태종)이 되었으나 낙향한 아버지가 맘에 걸렸다. 어떻게든지 모셔 와서 효도를 하고 싶었다. 아버지를 모셔오기 위해 사신을 함흥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많은 사신을 보냈으나 가기만 하면 소식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았다. 이성계가 번번이 활을 쏘아 죽이거나 가두어 버렸던 것이다.

   함흥차사란 말은 여기서 생겨났다.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 함흥행 사신을 함흥차사라고 하는데, 요즘은 심부름을 가서 소식이 없을 때 쓰이는 말이 되었다. 이제, 갈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보내지 않을 수도 없고.

   그때 마침 중추부사인 박순(朴淳)이 자원을 했고, 태종이 반가와 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박순은 일부러 새끼가 딸린 말을 타고 가서 망아지를 이성계가 있는 집 근처의 나무에 매어 놓고 어미 말을 타고 들어갔다. 어미 말과 망아지가 서로 찾으며 구슬프게 울자, 이 소리를 듣고 이성계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환궁할 뜻을 비친 이성계는 박순이 가고 나자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군사들에게 이렇게 지시를 했다.

   “가는 길에 용흥강이 있는데 박순이 강을 건넜으면 그대로 오고 건너지 않았으면 목을 베어 오라.”

   박순은 기분이 좋아 느긋하게 말을 몰았고, 군사들이 뒤쫓아 갔을 때는 막 강을 건너려던 참이었다. 군사들에 의해 목이 베어진 것은 물론이다. 이성계는 박순이 이미 강을 건넜으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결국 함흥차사는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그 후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아들 태종은 백관들을 이끌고 마중을 나갔다. 이때 이성계가 갑자기 태종에게 활을 쏘았는데, 이를 예측한 모사 하륜이 태종으로 하여금 기둥 옆에 서있도록 하여 화살이 날아왔을 때 기둥 뒤로 몸을 피함으로써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부자간의 불화가 빚어낸 이 희대의 에피소드는 함흥차사라는 고사성어를 후세에 남겨주게 되었다. 생각하건대 태조 이성계의 사리에 맞지 않는 후계자 선정과, 이에 반기를 든 걸출한 아들 방원의 권력욕이 빚어낸 비극의 드라마가 아닌가 싶다.

   조선조 스물일곱 분의 임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임금으로 태종 이방원을 꼽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것은 그가 비록 골육상쟁의 주인공이었지만 새 왕조의 기틀을 완성함으로써 다음 세종 대에 찬란한 문물이 꽃피는 터전을 마련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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