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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의 편린(片鱗)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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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의 편린(片鱗)

 

최용현(수필가)

 

   1990년대의 새해 첫날을 새롭게 맞이한다며 1989년의 마지막 날 전직 대통령을 국회 청문회장에 불러다 놓고 하루 종일 법석을 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그 1990년대의 첫 봄이 왔다.

   강산이 한 번 변하는 10년을 하나의 마디목으로 나누는 10년 분법을 따른다면 1990년은 분명 다시 마디가 새롭게 시작되는 시점이다.

   1950년대에 태어난 필자가 살아왔던 기간 동안에도 네 번의 마디목이 형성되었고, 이 기간 동안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자가 세 사람이 나타났다가 사라져간 사실만으로도 이 기간이 정치적 격동기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필자가 살아온 30여 년 동안, 정치적 변혁을 지켜보며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저항했던 민중의 관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에피소드를 몇 가지를 통하여 지난 시절의 편린(片鱗)으로 삼고자 한다.

   필자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던 1950년대는 국가적으로는 전후복구로 분주하던 시절이었고 민중은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이 지상과제였던 시절이었다.

   필자가 시골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는 419516의 격동기를 거쳐 군인출신의 한 영도자(?)가 나타나 힘차게 조국 근대화를 부르짖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아침조회시간에도 혁명공약을 소리 높여 외치던 그 시절, 초등학교 5학년 때 필자는 난생 처음으로 서울에 수학여행을 왔었다. 당시의 정해진 코스대로 창경원에도 가 보았고 전차를 타고 광화문 앞에 줄지어 선 위인들의 동상도 보았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74년 필자가 대학생이 되어 다시 서울에 왔을 때는 전차는 없어졌고 지하철 공사가 한창이었다. 광화문 앞 대로에 줄지어 서 있던 동상들도 거의 철거되고 없었다.

   이 동상들이 하나씩 철거되던 시절, 세간에 이런 수수께끼가 회자(膾炙)되고 있었다.

   ‘김유신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이 황당한 수수께끼의 정답은 이순신 장군이 이긴다는 것이다. 당시 김유신 장군의 동상은 시청 앞에 서있었고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중앙청 앞에 서있었다. 그런데 김유신 장군의 동상은 빽(back-ground)이 약해 철거되었고,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빽이 든든해서 철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청빽보다는 중앙청빽이 더 세었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다.

   그 시절엔 영도자의 취향과 잣대에 의해서 모든 일이 군대처럼 화끈하게 처결되었으니 이런 수수께끼가 나올 법한 시절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그분에 의해 겨레의 사표(師表), 또 성웅(聖雄)으로 추앙되지 않았는가.

   필자가 고등학교와 대학, 그리고 군대생활을 하던 시절인 1970년대는 소위 유신시대였다.

   영원할 것 같던 이 영도자도 80년대의 마디는 넘지 못할 운명이었는지 곳곳에서 거센 저항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 시대가 붕괴하는 19791026사건 직전에 실제로 있었던 한 에피소드를 소개해 본다.

   정권 말기적 광기(狂氣)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나던 그 무렵, 새 시대를 맞이하는 신호탄처럼 야도(野都)인 부산에서 대규모의 소요가 일어났다. 그리고 며칠 후 그 불길이 서쪽으로 번져가서 마산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부마항쟁(釜馬抗爭)이다.

   다시 서쪽으로 이어지면 다음 차례는 당연히 진주였다. 마산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진주에서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조선조까지만 해도 진주는 경상도의 도백(道佰)이 상주하던 곳이고, 지금은 경남을 대표하는 국립대학을 유치하고 있는 도시이다. 서부 경남의 중심지로서 부산직할시 분리 이후 경남의 도청소재지 유치문제로 마산과 20년간 다투었던 도시가 아니던가.

   결국 도청소재지는 신흥공업도시인 창원이 어부지리로 유치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창원과 인접한 마산이 판정승을 거둔 셈이 되었지만.

   그러나 어인 일인지 며칠이 지나도 진주에는 소식(?)이 없었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진주에 있는 K대학교의 학생회 간부들에게 발신지가 분명치 않은 편지가 쇄도하고 있었다. 그 편지에는 아무런 글도 적혀있지 않았는데,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가위가 그려져 있었다. 학생회 간부들이 그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짤라라! 이 병신들아!’

   결국 진주는 그냥 지나갔고, 그 불길은 다시 서쪽으로 이어져 다음해 봄 광주에서 저 유명한 광주항쟁이 발생하였다.

   필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1980년대는, 또다시 총으로 권력을 잡은 한 군인이 나타나서 세상을 전횡하던 시절이었다. 이 시대엔 위축된 국민의식이 자조적(自嘲的)인 모습으로 고스톱에 투영되었다. 이 시대엔 새 영도자(?)의 이름이 고스톱 앞에 붙었다. 이 고스톱은 판쓸이(청소)를 하면 피 한 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광이든, 열이든, 띠든, 피든 맘대로 한 장을 골라서 갖고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버마 아웅산 사태 후에는 아웅산 고스톱이라 하여 판쓸이를 하면 피 하나만 남겨놓고 광, , , 피를 모조리 쓸어 가는 무시무시한 전형으로 변질되었다. 피 한 장을 남겨 두는 건 봐 주는 게 아니고 피가 한 장도 없으면 피박을 씌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오야(?) 마음대로이다. 움츠린 민중들이 이 싹쓸이형 고스톱을 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꼈으리라.

   이 고스톱의 주인공도 막바지에 이르러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 629(629의 열자리 세장에 10)선언으로 민중에게 손을 들고 말았다.

   그리고 이 시대를 매듭짓는 오공비리(510122의 열자리 네 장에 20) 청산을 해놓고 새 시대를 맞이한다며, 지난 1989년 섣달 그믐날을 온통 제야(除夜)의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 그 법석을 떨었다.

   이제 1990년대가 시작되었다. 10년 동안엔 또 어떤 에피소드가 창출되어질 것인가. 필자의 어설픈 상상력으로는 과거 세 번의 마디목이 형성되는 동안 우리나라의 정치판을 주름잡았던 3김 씨의 성쇠와 부침(浮沈)에 관한 에피소드가 그럴듯하게 윤색되어 나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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