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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이야기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2.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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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이야기

 

최용현(수필가)

 

   최근, 십여 년간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며 장승을 찾아 사진에 담은 한 민속학자가, 전국에는 현재 180여 기()의 장승이 남아있다고 발표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장승이란 마을의 경계나 이수(里數)를 표시하기 위하여, 또는 각종 전염병과 재앙으로부터 마을을 수호하기 위하여 나무나 돌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새겨 마을 어귀나 산모퉁이, 인적이 드문 고갯길 등에 세운 푯말을 말한다. 크게 나누면 목장승과 석장승의 두 종류가 있는데, 목장승은 이제 거의 없어져 고사(古寺) 입구에나 몇 군데 남아 있고, 석장승은 아직도 곳곳에 비교적 많이 산재해 있다고 한다.

   장승은 장생 법수 벅수 등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바, 우리 민족의 기층문화(基層文化)의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산신 서낭신 용왕신 등이 상위신(上位神)으로 대접을 받는데 비해, 장승은 솟대나 돌무더기와 함께 하위신으로서 기층 민중들과 가장 가깝게 밀착되어 있었다.

   왕방울만한 눈동자, 주먹 같은 코, 귀밑까지 찢어진 입, 들쭉날쭉 제멋대로 생긴 이빨. 장승은 모두 하나같이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다. 이것은 사악한 귀신을 겁주게 하기 위한 의도일 뿐,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험악하게 생기기는 했어도 어딘지 모르게 익살스럽게 느껴지고, 듬직한 살붙이나 순박한 이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이다. 우리 민중들의 얼굴인 셈이다.

   장승은 보통 두 주()씩 세워져 있다. 한 주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또 한 주에는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새겨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더러는 OO장군 등의 이름을 붙인 장승도 있다. 또 드물게는 남근(男根)의 형상을 한 장승도 있는데, 이것은 특별히 득남을 기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자(祇子) 장승이다.

   장승의 역할도 시대의 조류에 따라 변모해 가고 있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출발하여 이정표, 아들 점지 등의 역할을 거쳐 최근에는 민주와 통일을 기원하는 시국 장승이 등장하기도 했다.

   장승의 유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화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그 중에서 산중의 폐쇄성으로 인해 발생할지도 모르는 근친상간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즉 천륜을 지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는 설화가 가장 유력하다.

   옛날 장승상(張承相)이라는 벼슬아치가 있었는데, 한번은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 자신의 의지로 음욕을 제어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임금은 이를 시험하기 위해 장승상을 그의 과년한 딸과 함께 인적이 드문 산중으로 보내 단칸방에서 단둘이 살게 했다.

   고립 무원한 산중에서 딸과 함께 살아가던 장승상은 그의 장담과는 달리 음욕을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딸을 범하고 말았다. 결국 임신한 딸은 자결했고, 장승상은 천륜을 어긴 죄로 참형을 당했다. 임금은 장승상의 형상을 나무와 돌에 새겨 전국 방방곡곡에 세우게 하여 후세의 경계(警戒)로 삼게 했는데, 이것이 장승의 유래가 되었다는 얘기이다.

   이 이야기는 민중들 사이에 구전되어 온 설화를 민속학자들이 채집한 것을 옮겨 실은 것인데, 그 내용이 너무 황당하고 패륜적이어서 그대로 믿기에는 왠지 거부감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근친상간을 막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리라.

   60년대 이후 거세게 밀어닥친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노변과 마을 입구에 초라하게 서 있던 장승들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힘찬 진군의 나팔소리는 장승에다 부여한 종교적인 의미까지도 함께 앗아가 버렸다. 이 비운의 시대를 맞은 장승의 몰락과정을 함축한 일화 하나를 소개해 본다.

   어느 길가 개울 옆에 목장승 하나가 서 있었다. 비가 와서 개울물이 많이 불어나 있었다. 이 때 한 길손이 나타났다. 그는 개울을 건너려고 했으나 도무지 건널 수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겁 없게도 옆에 서 있는 목장승을 뽑아서 개울에 가로질러 놓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갔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유히 사라졌다.

   잠시 후, 또 한 길손이 나타나 개울 앞에 섰다. 그는 장승이 개울에 가로질러 놓여 있는 것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그는 곧바로 장승을 들어다 제자리에 세워놓고 거푸 큰절을 했다. 그리고는 개울 건너는 것을 포기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다시 제자리에 세워진 목장승은, 생각할수록 자신을 뽑아 개울에 가로질러 놓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이 괘씸했다. 그는 장승대장에게 호소했다. 그리고 자신을 밟고 지나갔던 그놈을 잡아서 엄벌을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장승대장은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가 그놈을 잡아서 벌을 주면 그놈은 틀림없이 널 뽑아서 불에 태워 버릴 것이다. 불에 타 죽고 싶지 않거든 참는 게 좋다.”

   장승도, 장승대장도 별로 힘이 없는 모양이다. 이 이야기에서 확연히 다른 가치관과 행동을 통해 사물을 대하는 관점의 두 극단을 유추해 낼 수 있다. 하나는 기존 고정관념에 철퇴를 가한 진취적 자세이고, 또 하나는 고정관념에 대한 수구적 자세이다. 그 결과는 확연히 다르게 나타났다. 한 사람은 개울을 건너갔고 한 사람은 개울을 건너가지 못했다.

   여기서 전자(前者)의 행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이 사람에게 있어서 목장승은 하나의 통나무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반응이 있을 수 있는데, 통쾌감을 느끼는 사람과 낭패감을 느끼는 사람의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한 인간이 어떠한 관점에 서느냐 하는 문제는 쉽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성장과정, 환경, 지식, 인생관 등이 포괄적으로 작용하여 표출되기 때문이다. B. S. 라즈니쉬의 마음으로 가는 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관념이란 돌에 가까운 것이다. 굳어있는 관념은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리고 고정관념이란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리가 되어 주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장애물이 될 뿐이다.’

   그렇다. 고정관념은 선현들이 물려준 지혜일 수도 있지만 어이없는 편견일 수도 있다. 모든 관념의 주체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목장승을 통나무로 보느냐 그 이상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는 역시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서 결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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