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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의 월동준비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1.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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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의 월동준비

 

최용현(수필가)

 

   미련하고 우둔한 사람을 흔히 곰이라고 부른다. 육중한 몸을 이끌고 느릿느릿 걸어 다니는 곰의 이미지에서 나온 은유이다.

   그러나 곰은 그 외양에서 느껴지는 둔함과는 달리 매우 영악한 동물이다. 체격답지 않게 나무에도 잘 오르고, 땅도 잘 파며, 수영도 썩 잘한다. 육식을 주로 하는 동물이지만 죽은 고기는 절대로 먹지 않는 깔끔한 성미를 갖고 있다. 육식이 여의치 않을 땐 도토리 같은 열매를 즐겨 따먹는다. 네 발로 걸어 다니지만 사람처럼 두 발로도 걷는다.

   곰은 추운 겨울을 편안하게 지내기 위해 나름대로의 준비를 한다. 소위 월동준비를 하는 것이다. 가을이 되면 체내에 많은 지방을 축적해 두기 위해 부지런히 도토리를 찾아 다니면서 포식을 한다. 그리고 지방의 축적이 충분한지를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적당한 높이의 벼랑에 올라가 떨어져 본다. 그래서 엉덩이가 많이 아프면 아직 지방축적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다시 열심히 도토리를 따먹는다.

   계속 벼랑에서 떨어져 보고 엉덩이가 아프지 않아야 비로소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동굴 속에 들어가 칩거한다. 체내에 비축된 지방분은 발바닥에 운집되고, 곰은 겨우내 이 지방분을 핥아먹으면서 긴 겨울 동안을 편안하게 보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겨울은 여느 계절과 다를 바 없는 사계절의 하나일 뿐, 겨울에도 일을 해야 밥을 먹을 수 있는 건 마찬가지이다. 다른 계절과 다른 점을 굳이 찾는다면 겨울 동안 먹을 수 있도록 김장을 미리 해두는 것, 군대에선 제설작업을 위해 싸리비를 미리 준비해 놓는 것 정도라 할까.

   이처럼 겨울을 나는 것이 인간에게 특별한 의미가 없게 된 것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추위 정도는 거뜬히 극복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추운 겨울에도 일을 해야만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동물로 전락해 버린, 다시 말해서 봄부터 가을까지 열심히 일하고 겨울에는 편안히 쉬는 곰보다도 못한 신세가 되어버린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겨울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노후야말로 곰이 월동준비를 하듯이 미리 대비하고 준비를 해야 할 인생에 있어서의 겨울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교육시키고, 결혼시키고, 노후를 맞이하는 정해진 궤도를 거치게 된다. 이것을 라이프 사이클(life cycle)이라고 하는데, 이 중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는 것은 부모에게 의지할 수 있고, 자녀를 교육시키고 결혼시키는 것은 열심히 일해서 뒷바라지 해주는 것으로 해결할 수가 있으나 노후, 즉 인생에서의 겨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젊고 기력이 왕성할 때는 자신이 늙어 간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기 쉬우므로 노후니 여생이니 하는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식 뒷바라지하다 자신의 노후 준비는 전혀 해놓지 않은 우리 부모세대의 오늘을 생각해보면 그 현상이 선명하게 와 닿지 않은가.

   우리나라도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국민생활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고, 이에 따른 보건의료기술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선진국과 거의 맞먹는 수준으로 연장되고 있다. 1980년 기준 남자 63, 여자 69세이던 평균수명이 1990년에는 각각 67세와 75세로 평균 70세를 넘게 되었고, 2000년에는 다시 남자 70, 여자 78세가 되어 명실상부한 고령화 사회가 되었다. 2010년에는 평균수명이 80세에 육박할 게 뻔하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 55-60세에 정년퇴직을 한다고 가정하면 줄잡아 20년 동안은 무수입 상태가 된다. 또한 라이프 사이클로 볼 때 정년퇴직의 시점인 55세 전후에 자녀의 교육비나 결혼비용 등으로 가계비용이 최대치에 이르는 시점이 된다.

   그러므로 혹시 퇴직금을 노후자금으로 고스란히 남겨둘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기대로 끝나버릴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이것은 순탄한 직장생활을 전제로 했을 때를 가정한 것이고, 가장(家長)이 뜻하지 않는 병마나 사고로 쓰러지거나 원하지 않는 퇴직을 당했을 때는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

   확실히 다가올 인생의 겨울인 노후, 그리고 언젠가 불쑥 다가올 지도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여 평소에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준비를 해둔 사람과 해두지 않은 사람은 뜻하지 않은 만일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준비를 해둔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해두지 않은 사람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안전벨트를 예로 들어보자. 안전벨트를 착용하는 것은 귀찮기도 하고 또 기분 나쁜 일이라고 무시해 버리기 쉽지만, 불의의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엔 생과 사의 갈림길이 될 만큼 엄청난 차이가 생기지 않는가.

   이처럼 사소한 것에서부터 먼 미래를 대비한 장기적인 대책에 이르기까지 평소에 준비를 해두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사회보장제도가 거의 완비되어 있는 선진국에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한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최저생활은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의 국민들이 그렇지 못한 나라의 국민들보다 더 많은 저축을 하고, 또 더 많은 보험에 스스로 가입하고 있는 사실은, 선진국 국민일수록 더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유가 있는 이들보다 그렇지 못한 우리들에게 더욱 절실한데도 말이다.

   불과 몇 년 전에 전 국민 건강보험과 국민연금제도가 시작된 우리나라의 이런 저런 사정을 감안해 볼 때, 정부를 믿고 기대기에는 미덥지 못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젊고 생활능력이 있을 때 스스로 나름대로의 준비를 해두는 방법 외에는 달리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보장성보험이나 연금보험에 가입해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리라. 생명보험의 가장 큰 문제점이던 물가보상도 요즘엔 해주고 있으니까. 일단 유사시의 혜택을 제외해놓고 생각한다면 은행연금이나 펀드, 역모기지론 등의 제도를 활용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리라. 요는 자신에게 가장 합당한 준비를 하자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월동준비를 시작하자. 그리고 이왕 시작한다면 곰보다는 더 나은 준비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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