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꽃과 튤립
최용현(수필가)
어느 산골에 할머니가 두 손녀와 함께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큰손녀는 예뻤지만 심술이 좀 있었고, 작은손녀는 예쁘지는 않았지만 마음씨가 고왔다. 할머니는 두 손녀를 정성껏 키워서 차례로 시집보냈다.
큰손녀는 가까운 동네의 부잣집 아들에게 보냈고, 작은손녀는 산 너머 산지기의 아내가 되었다. 외톨이가 된 할머니는 하루하루 늙어만 갔다. 허리는 꼬부라지고 머리는 하얗게 변해갔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할머니는 쌀 한 톨 남지 않은 오두막집을 나서서 시집간 후 한 번도 오지 않은 큰손녀 집을 찾아갔다.
“그런 꼴로 오시면 어떡해요? 창피하게….”
큰손녀는 할머니를 대문 앞에서 쫓아 버렸다.
할머니는 다시 작은손녀를 찾아 나섰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꼬불꼬불 산길을 걸어가는데, 모진 겨울바람은 주름 가득한 얼굴 위로 사납게 불어댔다.
겨우 산 고개를 넘었으나 저만치 작은손녀 집이 보이는 언덕에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뒤늦게 이를 안 작은손녀는 눈물범벅이 된 손으로 할머니를 뒷산 양지쪽 언덕에 묻었다.
따뜻한 봄이 되자, 할머니의 무덤 위에 하얀 솜털을 뒤집어 쓴 자주색 꽃 한 송이가 허리가 굽은 채 다소곳이 피었다. 할미꽃이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이른 봄날, 산기슭이나 시골길 논둑에서 홀로 피어있는 할미꽃을 보면서, 어릴 때 읽은 할미꽃 전설을 떠올리며 가슴 아파하던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더러 있을 것이다.
초등학교 몇 학년 때인지, 교과서에 나오는 이 전설을 읽고 어찌나 슬프고 가슴이 아팠던지, 그날 집에 와서 ‘내게는 왜 할머니가 없느냐’고 어머니께 따진 기억이 있다. 할머니를 잘 모셔야겠다는 어린 마음에서. 좀 커서 생각해 보니 잘못 짚었었다. 아버지께 물어 보아야 하는 건데, 할머니가 워낙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도 우리 할머니를 모르시는데….
뭇 꽃들 중에서 할미꽃 찔레꽃 나팔꽃처럼 시골스럽고 수수하게 생긴 꽃들은 동양 쪽에 전설이 있고, 튤립, 수선화, 맨드라미, 물망초처럼 도시스럽고(?) 세련된 꽃들은 서양 쪽에 전설이 있다.
인성(人性)을 내향과 외향으로 분류한다면, 동양인은 아무래도 내향 쪽에 분류될 수밖에 없고, 서양인은 외향 쪽에 분류된다. 꽃의 전설에서도 이런 차이가 여실히 드러난다. 우리나라의 할미꽃에 대응시킬 수 있는 꽃으로 서양엔 튤립이 있다. 꽃 모양이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점도 상당하다. 할미꽃은 홀로 피고, 튤립은 무리지어 핀다. 할미꽃은 은은한 자주색이고, 튤립은 정열적인 빨간색이 주조를 이룬다. 할미꽃은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튤립은 꼿꼿이 세우고 있다. 또 할미꽃은 부끄러운 듯 하얀 솜털로 몸을 가리고 있지만, 튤립은 현란한 누드처럼 알몸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다.
튤립도 숭고하고 애절한 사랑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아름다운 처녀가 세 사람의 청년에게서 구혼을 받았다. 한 사람은 왕자, 한 사람은 기사(騎士), 또 한사람은 상인이었다. 그들은 그 처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왕자는 왕관을, 기사는 보검을, 상인은 황금을 바치겠다고 했다.
‘누구를 선택하랴….’
세 청년의 순수한 사랑을 믿었던 처녀는 한 청년을 선택하면 다른 두 청년이 상처를 입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세 청년을 두고 고민에 빠진 처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 청년은 함께 모여 처녀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봄이 되자, 처녀의 무덤 위에 예쁜 꽃이 한 송이 돋아났는데, 꽃송이는 왕관 같고 잎사귀는 칼 같고 뿌리에는 황금덩이 같은 인경(鱗莖)이 붙어 있었다. 튤립이다.
할미꽃 전설은 할머니와 손녀의 수직적 구도이고 테마가 효(孝)이다. 튤립의 전설은 처녀와 청년의 수평적 구도이고 테마는 사랑이다.
할미꽃 전설은 할머니를 죽게 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왠지 모르게 죄스러운 마음이 들게 한다. 그러나 튤립의 전설은 처녀를 죽게 함으로써 사랑을 숭고하게 생각하도록 한다.
할미꽃 전설은 두 손녀 중 한쪽에게 악역을 맡겨 권선징악의 정해진 외길 결론으로 유도한다. 그러나 튤립의 전설은 세 청년의 직업적 차이가 있을 뿐, 악역도 없고 정해진 결론도 없다. 세 청년 중에서 선택은 독자들 스스로 하도록 한다. 만일 그중 한 청년이 자신의 사랑을 바치겠다고 했더라면….
할미꽃 전설에서 두 손녀가 등장하는 것은 한국인 특유의 간접화법에 다름 아니다. 두 손녀대신 두 아들을 대입시켜 보면 전설의 의도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들에게 하는 훈계를 애꿎은 손녀에게 뒤집어씌운 거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푼 만큼 자식도 부모에게 베풀 것이라고 기대하는 데서 비극의 뿌리가 잉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후일, 부모를 하늘처럼 모실 거라 믿고 금이야 옥이야 하고 키워온 자식이, 제 애들은 온갖 좋은 것 다 사 먹이고 입히면서 늙은 부모는 안중에도 없다고 푸념하지 말자. 저들이 제 아이들 데리고 바캉스 갈 때 늙은 부모는 빈 집 지켜주는 신세라고 한탄하지도 말자. 저들도 어른이 되고 또 노인이 된다.
아예, 자식은 키워서 내보내자. 따로 살면 자식에게 구박받는 일은 없다. 푸대접한다고 한탄할 일도 없다. 따로 살면서 가끔씩 찾아오는 자식은 부모를 홀대하지 않는다. 저들이 바캉스 갈 때 부모도 따로 바캉스가면 된다.
서양인은 자식이 크면 내보내서 따로 살게 한다. 비극의 화근을 원천적으로 없앤 거다.
할미꽃 전설이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사라진 건 다행한 일이다. 꽃 이야기가 꼭 필요하다면 할미꽃보다는 튤립의 전설이 더 낫다. 서양 꽃이면 어떠랴.
어린아이들을 모두 죄인으로 만들어서 억지로 효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아름다운 사랑을 가르쳐서 효를 알게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사랑을 제대로 배운 아이가 제 부모에게 패륜을 저지르는 일은 없다. 제 할머니를 구박하는 일은 결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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