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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오기(구덕수원지)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1.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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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오기(구덕수원지)

 

최용현(수필가)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한 번쯤은 전기(轉機)를 맞이하는 시점이 있다. 이때의 휘청거림으로 그 후의 삶이 변모한다. 더욱 강해지는 사람, 아예 부러져 버리는 사람, 또 비틀거리며 살아가는 사람.

   19723, 부산에서 형과 함께 하숙을 해오던 나는, 남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합류하자 서대신동에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자취 생활이었지만 근엄하고 부지런한 형이 아침담당, 3 수험생인 난 점심담당(?), 졸병인 동생은 저녁담당으로 역할분담을 하여 제법 오붓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 집에는 주인집을 포함하여 네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주인집 옆 중간 방엔 30대 후반의 한 과부가 세 딸, 외아들과 함께 세 들어 있었다. 큰딸은 부산여상 1학년, 둘째 딸은 초등학교 6학년, 셋째 딸은 4학년, 그리고 일곱 살 난 막내아들.

   그 엄마는 아침에 딸들을 학교에 보내고, 아들은 교회 모자원(母子院)에 맡겨놓고 옷 보따리 행상을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왔다. 저녁준비는 항상 큰딸이 맡았는데 큰딸은 착하고 유순했다. 키가 크고 갸름한 얼굴에 수줍음을 타는 편이었다.

   둘째딸은 호리호리하고 예뻤다. 머리띠를 한 긴 머리, 암록색 짧은 주름치마를 입은 모습이 깜찍했다. 둘째딸, 그 아이는 나를 잘 따랐다. 저녁을 먹은 후 매일 그 애랑 산책을 했다. 그 애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구덕운동장 담장 길을 한 바퀴 돌아오는 것이 우리의 정해진 산책 코스였다.

   “, 어디 갔다 오니?”

   처음엔, 그 애에게 설거지를 시키려고 기다리던 언니가 닦달을 했다.

   “오빠랑 데이트하고 온다.”

   그 애의 대답은 맹랑했다. 내가 뒤따라 들어오자 언니는 얼굴을 붉히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밤 열 시쯤, 가끔 나는 머리를 식히러 대문간에 나가곤 했는데, 엄마를 기다리던 그 애도 내 인기척을 듣고 배시시 웃으며 나오곤 했다. 춥다며 내 풍성한 잠옷 윗도리 단추를 열고 그 속에 들어와 단추를 채우고 함께 앞을 보고 서 있곤 했다.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내가 두 손을 그 애 가슴에 모으고 있으면 그 애는 가만히 내 손을 밀어 내렸다. 나는 또 살며시 손을 올렸고 그 애는 또 밀어 내렸다. 그 애의 가슴에 봉긋하게 무엇이 돋아나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대학생인 형과 고1인 동생은 고향으로 가고 나 혼자 자취방에 남게 되었다. 내가 보충수업을 받으러 학교에 가고 나면 내 방은 언제나 그 애 차지였다. 책상서랍도 뒤지고 노트에 낙서도 해놓고, 부채에다 성부 성자 성신이라고 써놓기도 했다. 어떤 때는 내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도 있었다. 치마가 올라가 요염한 모습으로.

   ‘이 애가 크면 이 애랑.’

   나는 달콤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그 애는 내게 천사였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다. 913일 밤, 비가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했다. 그날 밤늦게 대문간에 나와 서있는데 그 애가 쪼르르 나왔다. 엄마가 아직 오시지 않았단다. 내 잠옷 속에 들어온 그 애가 노래를 불렀다. 따오기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 메이뇨

       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해돋는 나라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 메이뇨

       내 아버지 가신 나라 해돋는 나라

 

   1972914일 목요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 옆 도랑 물소리가 요란했다. 비는 여전히 퍼붓고 있었다. 형은 벌써 일어나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었고, 곧 아침밥이 들어왔다. 나와 동생은 책가방을 챙겨서 방을 나섰다. 그 아이가 마루 끝에 서서 약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오늘 학교에 안 간다~. 엄마가 가지 말라고 했다~.”

   “, 까불면 물에 떠내려간다.”

   그 애에게 꿀밤을 한 대 먹이고 나오는데, 그 애 엄마가 부엌에서 보고 빙그레 웃었다. 경남상고 앞길에 나오자 무릎까지 오는 물살을 건너지 못한 여학생 몇 명이 서있었다. 그 애 언니도 서있었다. 손을 잡고 물살을 건너게 해주고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둘째시간 수업 중에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구덕저수지가 터졌다며 대신동에 사는 학생은 빨리 집으로 가보란다. 우리 집 뒤 산중턱에 저수지가 있던 것이 생각났다.

   집 가까이 언덕에 오자, 우리 집 주위의 단층집, 이층집, 가게, 도랑, 다리, 나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운동장처럼 훤했다. 사람들이 모여서 시체 발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집 주위에서 70여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우리 집 4가구 열여섯 식구 중에서 여덟 명이 죽었다. 집안에 있던 사람은 모두 죽었다.

   그 애 집엔 학교에 간 언니만 남겨놓고 나머지 네 사람이 모두 죽었다. 우리 삼형제는 모두 무사했다. 형이 설거지를 하고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선 지 10분쯤 뒤 저수지 둑이 터졌다고 한다. 만일 그 둑이 한밤중이나 아침 일찍 터졌으면 어찌 되었을지.

   그날 오후, 그 아이의 시신을 찾았을 때 나는 그 아이를 안고 하늘을 보며 울었다. 내 열 세 살 소녀는 그렇게 갔다. 그때 살아난 언니에 의해 그 아이는 엄마, 두 동생과 함께 화장되었다. 그 애와의 6개월, 그때 시작된 열아홉 살 소년의 인생앓이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그 아이는 별이 되어 내 가슴에 남았다.

   내 인생 여정에서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오십이 다된 지금, 시 나부랭이를 적어서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피 끓는 젊은 날에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인생사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사랑임을 알지 못하고 살아갈 뻔하지 않았는가.

   부자란,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가슴속에 샛별처럼 영롱한 추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둑이 무너져 물이 다 빠진 구덕수원지(1972. 9.14)

 

동아일보 기사(1972.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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