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한 번쯤은 전기(轉機)를 맞이하는 시점이 있다. 이때의 휘청거림으로 그 후의 삶이 변모한다. 더욱 강해지는 사람, 아예 부러져 버리는 사람, 또 비틀거리며 살아가는 사람….
1972년 3월, 부산에서 형과 함께 하숙을 해오던 나는, 남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합류하자 서대신동에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자취 생활이었지만 근엄하고 부지런한 형이 아침담당, 고3 수험생인 난 점심담당(?), 졸병인 동생은 저녁담당으로 역할분담을 하여 제법 오붓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 집에는 주인집을 포함하여 네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주인집 옆 중간 방엔 30대 후반의 한 과부가 세 딸, 외아들과 함께 세 들어 있었다. 큰딸은 부산여상 1학년, 둘째 딸은 초등학교 6학년, 셋째 딸은 4학년, 그리고 일곱 살 난 막내아들.
그 엄마는 아침에 딸들을 학교에 보내고, 아들은 교회 모자원(母子院)에 맡겨놓고 옷 보따리 행상을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왔다. 저녁준비는 항상 큰딸이 맡았는데 큰딸은 착하고 유순했다. 키가 크고 갸름한 얼굴에 수줍음을 타는 편이었다.
둘째딸은 호리호리하고 예뻤다. 머리띠를 한 긴 머리, 암록색 짧은 주름치마를 입은 모습이 깜찍했다. 둘째딸, 그 아이는 나를 잘 따랐다. 저녁을 먹은 후 매일 그 애랑 산책을 했다. 그 애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구덕운동장 담장 길을 한 바퀴 돌아오는 것이 우리의 정해진 산책 코스였다.
“너, 어디 갔다 오니?”
처음엔, 그 애에게 설거지를 시키려고 기다리던 언니가 닦달을 했다.
“오빠랑 데이트하고 온다.”
그 애의 대답은 맹랑했다. 내가 뒤따라 들어오자 언니는 얼굴을 붉히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밤 열 시쯤, 가끔 나는 머리를 식히러 대문간에 나가곤 했는데, 엄마를 기다리던 그 애도 내 인기척을 듣고 배시시 웃으며 나오곤 했다. 춥다며 내 풍성한 잠옷 윗도리 단추를 열고 그 속에 들어와 단추를 채우고 함께 앞을 보고 서 있곤 했다.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내가 두 손을 그 애 가슴에 모으고 있으면 그 애는 가만히 내 손을 밀어 내렸다. 나는 또 살며시 손을 올렸고 그 애는 또 밀어 내렸다. 그 애의 가슴에 봉긋하게 무엇이 돋아나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대학생인 형과 고1인 동생은 고향으로 가고 나 혼자 자취방에 남게 되었다. 내가 보충수업을 받으러 학교에 가고 나면 내 방은 언제나 그 애 차지였다. 책상서랍도 뒤지고 노트에 낙서도 해놓고, 부채에다 ‘성부 성자 성신’이라고 써놓기도 했다. 어떤 때는 내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도 있었다. 치마가 올라가 요염한 모습으로.
‘이 애가 크면 이 애랑….’
나는 달콤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그 애는 내게 천사였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다. 9월 13일 밤, 비가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했다. 그날 밤늦게 대문간에 나와 서있는데 그 애가 쪼르르 나왔다. 엄마가 아직 오시지 않았단다. 내 잠옷 속에 들어온 그 애가 노래를 불렀다. 「따오기」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 메이뇨
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해돋는 나라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따옥 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 메이뇨
내 아버지 가신 나라 해돋는 나라
1972년 9월 14일 목요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 옆 도랑 물소리가 요란했다. 비는 여전히 퍼붓고 있었다. 형은 벌써 일어나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었고, 곧 아침밥이 들어왔다. 나와 동생은 책가방을 챙겨서 방을 나섰다. 그 아이가 마루 끝에 서서 약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오늘 학교에 안 간다~. 엄마가 가지 말라고 했다~.”
“너, 까불면 물에 떠내려간다.”
그 애에게 꿀밤을 한 대 먹이고 나오는데, 그 애 엄마가 부엌에서 보고 빙그레 웃었다. 경남상고 앞길에 나오자 무릎까지 오는 물살을 건너지 못한 여학생 몇 명이 서있었다. 그 애 언니도 서있었다. 손을 잡고 물살을 건너게 해주고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둘째시간 수업 중에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구덕저수지가 터졌다며 대신동에 사는 학생은 빨리 집으로 가보란다. 우리 집 뒤 산중턱에 저수지가 있던 것이 생각났다.
집 가까이 언덕에 오자, 우리 집 주위의 단층집, 이층집, 가게, 도랑, 다리, 나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운동장처럼 훤했다. 사람들이 모여서 시체 발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 집 주위에서 70여명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우리 집 4가구 열여섯 식구 중에서 여덟 명이 죽었다. 집안에 있던 사람은 모두 죽었다.
그 애 집엔 학교에 간 언니만 남겨놓고 나머지 네 사람이 모두 죽었다. 우리 삼형제는 모두 무사했다. 형이 설거지를 하고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선 지 10분쯤 뒤 저수지 둑이 터졌다고 한다. 만일 그 둑이 한밤중이나 아침 일찍 터졌으면 어찌 되었을지….
그날 오후, 그 아이의 시신을 찾았을 때 나는 그 아이를 안고 하늘을 보며 울었다. 내 열 세 살 소녀는 그렇게 갔다. 그때 살아난 언니에 의해 그 아이는 엄마, 두 동생과 함께 화장되었다. 그 애와의 6개월, 그때 시작된 열아홉 살 소년의 인생앓이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그 아이는 별이 되어 내 가슴에 남았다.
내 인생 여정에서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오십이 다된 지금, 시 나부랭이를 적어서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피 끓는 젊은 날에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인생사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이 ‘사랑’임을 알지 못하고 살아갈 뻔하지 않았는가.
부자란,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가슴속에 샛별처럼 영롱한 추억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