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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오기, 20년 후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1.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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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오기, 20년 후

 

최용현(수필가)

 

   ‘따오기라는 제목으로 필자의 고3시절의 아픈 추억을 소개한 바 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오늘은 그 과부집에서 혼자 살아남은 큰딸을 찾은 얘기를 하고자 한다.

   1972914일 목요일, 집중호우로 부산 대신동 산중턱에 있던 구덕저수지가 붕괴되어 그 아래 주택가를 덮치면서 많은 인명피해를 냈다. 내가 자취하던 집에도 4가구 16명이 살고 있었는데 집 안에 있던 8명이 모두 죽었다. 우리 3형제는 학교에 가는 바람에 무사했다. 우리 방 옆 과부 집에는 세 딸과 외아들이 살고 있었는데 부산여상 1학년이던 큰딸만 학교에 가서 살았고, 엄마와 세 아이는 모두 죽었다.

   죽기 전날 밤 내게 따오기노래를 불러준 구덕초등학교 6학년이던 둘째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나는 인생의 진로가 바뀔 만큼 휘청거렸고, 결국 글 쓰는 사람이 되었다. 당시 부산공고 1학년이던 동생은 극도의 페시미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22살 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살던 집이 송두리째 떠내려가 버린 뒤 나는 은하여중에 마련된 수재민수용소에서 며칠을 지내다가 동대신동 영남상고 근처에 방을 얻어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며칠 뒤 집 앞에서 우연히 그 과부 집에서 혼자 살아남은 큰딸을 만나게 되었다. 외삼촌 집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그 언니(그냥 언니라 해두자)를 따라가니 여기라며 외삼촌 집을 가르쳐 주었다. 공교롭게도 우리 형제가 새로 얻은 방과 아주 가까웠다. 그 언니가 외삼촌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외삼촌이 엄하시니 자주 전화하지는 말라는 당부와 함께.

   그 후 가끔 전화로 그 언니의 소식을 듣곤 했는데, 그해 내가 대학입시에서 낙방을 하고 나서부터는 인생무상, 삶의 회의에 빠져 그 언니에게 연락도 하지 못했다. 일 년 후,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왔고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3년 후에 제대를 하자마자 그 집에 전화를 했으나 다른 사람이 받았다. 이사를 갔단다. 그로부터 영영 그 언니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지난번 따오기를 발표하고 난 후, 갑자기 그 언니의 안부가 사무치게 궁금해서 부산에 사는 친구에게 부산여상에 가서 그 언니의 주민등록번호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 주민등록번호만 알면 어떻게든 현재 살고 있는 주소를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학적부엔 주민등록번호가 기재되어 있지 않았더라고 연락이 왔다. 언제 부산에 가면 옛날 그 삼촌 집을 찾아보고 이사 간 집을 계속 추적해 봐야지.

   1992125일 토요일, 이종사촌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부산에 갔다. 그 사고 후 20년 만에 대신동 그 수마(水魔)의 현장에 가보았다.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수마가 할퀴고 간 그 물길이 바로 시원하게 뚫린 8차선 도로가 되어 구덕터널로 이어져 있었다. 소 잃고 난 후 훌륭하게 고쳐진 외양간.

   옛날 그 삼촌 집을 가까스로 찾았다. 그 집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새 상가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난감했다. 목이 말랐다. 음료수를 마시려고 옆 가게에 들어갔다. 50대쯤의 아주머니가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이 자리에서 장사를 오래 했는지 물었더니 25년쯤 되었다고 했다. 20년 전에 바로 옆집에 살던 사람을 찾는다고 하자, 놀랍게도 잘 알고 있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그 집 말씀이죠? 이사 간 지 오래 되었는데요.”

   “그 집에 부산여상을 졸업한 키 큰 아가씨가 있었는데 혹시 아시는지요?”

   “알죠, 그때 물난리 때 가족을 모두 잃고 이 집에 와서 살던 아가씨 말이죠? 목사와 결혼해서 서울에 산다던데요.”

   틀림없었다. 그 아가씨를 찾으려고 서울에서 왔다고 했더니 교회에서는 알지 모른다며 그 삼촌 이름과 예전에 다니던 교회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남포동 그 교회를 찾아갔다. 젊은 여자가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삼촌 이름을 댔더니 그 교회의 장로님이라면서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나는 혹시 그 집에서 이상하게 생각 할까봐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라고 했고, 가까스로 그 언니의 서울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다. 그녀가 서울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다음날, 서울에서 전화를 했다. 몹시 반가워했다. 그녀도 나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여드름투성이의 고등학생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다며, 그녀가 먼저 만나자고 말했다.

   이튿날 저녁, 고등학생이던 소년과 소녀는 20년 후 서울 신촌에서 다시 만났다.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역시 들은 대로 목사 부인이,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20년 전의 여학생 그대로의 밝고 순수한 얼굴이었지만 이제 수줍어하지는 않았다. 세월의 흔적이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했다. 엄마와 동생들은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나는 무신론자이고 심정적으로는 불교 쪽에 가까운 편이지만 종교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 언니를 오늘까지 지탱하게 해 준 것이 하느님의 보살핌, 즉 신앙의 힘임을 나는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그녀는 저녁 설거지는 꼭 저녁에 하고, 자기 전에는 주변을 항상 깨끗이 정리해 놓고 잠자리에 든다고 했다. 밤사이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해놓는 것이란다. 순탄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겐 한이 맺힌 절규이리라.

   며칠 뒤, 그녀의 가족을 우리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오누이가 되기로 했다.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살기로 했다. 아내도 쾌히 승낙을 했고 그녀의 남편도 기꺼이 동의해 주었다. 돌아갈 때 아내가 설날 친정에서 갖고 온 찹쌀을 나누어서 비닐봉지에 담아 주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흐뭇했다.

   나는 그녀가 갖고 온 동생 -따오기에 나오는 열세 살 소녀- 의 단 한 장 남은 20년 전의 사진을 선물로 받았다. 그 아이가 사진 속에서 밝게 웃고 있었다. 자꾸만 콧등이 시큰거려서 베란다로 나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총총했다. 별 하나가 유난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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