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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과 말(馬)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1.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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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과 말()

 

최용현(수필가)

 

   상가(喪家)에 가보면 조화(弔花)가 늘어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조화에는 어김없이 보낸 사람의 직함과 성명이 큼지막하게 씌어져 있다. 망자(亡者)나 상제(喪制)가 저명인사이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인 경우, 그에 비례해서 조화도 화려해지고 또 많아진다.

   또한 조화를 보낸 사람의 지위에 따라 놓여지는 자리가 달라진다. 요즘 장례식장에 가보면 조화를 서로 좋은(?) 자리에 놓으려고 상제와 문상객, 혹은 문상객 상호간에 시비가 벌어지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기도 한다.

   조화란 본시 망자를 조상(弔喪)하기 위하여 영전에 바쳐진 꽃이다. 그러나 조화들이 놓여져 있는 위치와 방향을 보라. 망자를 향해서 놓여진 조화를 본 적이 있는가? 상제와 문상객들이 잘 볼 수 있도록 통로에 줄줄이 놓여져 있는 조화를 두고 망자를 위한 것이라고 우길 수는 없으리라.

   예부터 인생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 명절과 관혼상제(冠婚喪祭)를 꼽아왔다. 끊임없이 이어져 온 전통과 풍속은 조상과 후손을 이어주고 이웃과 이웃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고리이다.

   그러나 전래의 의식이 너무나 형식에 치우쳐 있고 또 시간적, 물적 낭비가 심한 점을 감안하여 그 절차와 형식을 아주 간소화 한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하여 시행해 온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관혼상제의 네 가지 중에서 관례(冠禮)와 상례(喪禮), 그리고 제례(祭禮)는 그런 대로 간소화되어 가고 있는 것 같으나 유독 혼례(婚禮)만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게다가 요즘은 애들 백일이다, 돌이다, 부모 회갑이다, 칠순이다 하여 새로운 의식과 잔치거리가 더 생겨났다.

   관례는 성인이 되었음을 나태내기 위해 갓을 씌우는 의식으로, 여자의 경우는 대개 혼사를 앞두고 거행되고 계례(笄澧)라고 불렀다고 한다. 옛날에는 일가친척들이 모인자리에서 성인이 될 청년이 의관과 신발을 갖추고 뜰에 나와 앉으면 정성껏 머리를 빗기고 머리에 관을 씌운 다음, 조삼(早衫)을 입히고, 혁대를 띠우고, 신을 신겼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뚜렷한 의식이 없는 것 같다.

   또, 상례를 보면 장일(葬日)은 거의 3일장으로 정착되어 있어 사망일을 알면 장일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상기(喪期)도 삼우제(三虞祭)를 지내면서 탈상하는 것이 거의 보편화되었고 길어야 49일 혹은 100일 탈상 정도가 고작이다. 5일장, 7일장에다, 1년상이니 3년상이니 하는 이야기는 TV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의식자체는 분명히 간소화되었다.

   제례도 까다로운 절차나 격식이 사라졌다. 대학교육을 받아도 지방(紙榜) 하나 제대로 쓸 줄 모르는 것이 현실임을 감안하여 가정의례준칙엔 한글로도 지방을 쓰도록 되어 있다. 바쁜 현대인들이 까다로운 격식을 지키지 않아도 되도록 해놓은 것이다. 제삿날은 흩어져 살던 일가친척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날쯤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어쩌면 제례의 진정한 의미가 이런 것이 아닐는지.

   혼례의 경우는 좀 다르다. 신부집과 신랑집을 오가며 이틀, 사흘씩 행하던 결혼의식이 언제부터인지 20분도 채 걸리지 않을 만큼 극단적으로 간소화되었다. 하객들은 돈 봉투를 접수시키고 그 20분 동안만 결혼식의 증인이 되어 주고 근처 식당에서 전쟁 치르듯 갈비탕 한 그릇 먹고 나면 하객으로서의 예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20분 동안 입을 웨딩드레스를 빌리는데 수십만 원이 들어도 마다하는 신부가 없고, 혼수는 또 어떤가? 일부 상류층의 예이긴 하지만 가전제품은 어느 나라 제냐, 몇 평짜리 아파트냐, 열쇠가 몇 개냐, 실로 가관의 풍경을 곳곳에서 보지 않는가. 게다가 신랑이 무슨 냐에 따라서 신부의 갖고 오는 열쇠 숫자가 달라진다고 하니.

   한 마디로 혼례는 황금만능의 세태를 가장 단적으로 표현하는 돈 잔치가 되어 버렸다.

   상례는 망자를 저 세상으로 보내는 의식인 바, 무엇보다도 엄숙하고 근신해야 할 예이다. 그러나 인간의 교활하고 타산적인 본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잘 드러나는 경우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필자가 사는 동네에 초상이 났다. 모 경찰서에 교통계장으로 근무하는 사람이 모친상을 당한 것이다. 외아들인 그 교통계장은 동네에서 평판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의 아내가 병든 노모를 구박하는 모습이 동네사람들의 눈에 자주 띈 것이다.

   병원 한 번 제대로 못 가보고 딸네 집을 전전하던 그 노모를, 사망하기 불과 며칠 전에 이 집으로 모셔 왔다고 한다. 사망 직전에 모셔온 탓에 남의 눈 때문에 모셔 왔다느니, 조위금 때문에 모셔 왔다느니 말들이 많았다.

   도로변인 그의 집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그런데 이날부터 출상(出喪)할 때까지 만 이틀 동안 이 집 앞의 2차선 차도 중 한쪽 차선 수십 미터가 온통 영업용 택시들로 꽉 채워졌다. 빠져나가고 들어오는 차량으로 온종일 교통이 마비될 정도로 택시기사들의 문상이 끊이질 않았다.

   그 수많은 택시기사들이 고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왔을 리는 만무하고, 아무튼 교통계장의 위세가 이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다. 후일 그 교통계장이 죽었을 때도 택시기사들이 이렇게 많이 찾아올까 하는 생각을 하니 옛 속담 하나가 떠올랐다.

   ‘정승이 죽으면 빚을 지고, 정승집 말이 죽으면 논을 산다.’

   표리가 부동한 인간의 교활함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달리 있을까?

   정승집 말이 죽으면 정승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문상객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조위금으로 말의 장례(?)를 치르고도 돈이 남아 논을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승이 죽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정승이 죽었으니 이젠 계산이 끝난 것이다. 문상객이 많을 리 없다. 그렇지만 정승 집에는 격에 맞는 장례를 치르려니 빚을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두(冒頭)에서 지적한 조화와 함께 기묘하게 변질된 상례의 모습이다. 모든 것이 다 변한다 해도, 한 인간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그 사람이 일생을 마감한 이후 그의 관 뚜껑에 못을 박고 나서야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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