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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전혜린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1.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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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혜린

 

최용현(수필가)

 

        “최후의 만찬 - 언제나 최후다, 우리에게는. 그것도 무엇이 끝난 최후가 아니라 아무 것도 생성 이전의 최후.

     경건하게 ()해지는 만찬. 비어지는 3개의 주전자. 비약하는 환타지-, 그리고 대상을 잃은 채 헤매는 amour.”

 

   서른 한 살의 나이에 어린 딸 하나를 남겨놓고, 새코날 마흔 알로 세상을 떠나간 전혜린이 메모지에 긁적거려 놓은 글이다. 이 짧은 글귀 속에서도 최후, 만찬, 환타지, amour 등 페시미즘에의 광적인 집착을 느낄 수 있다.

   전혜린의 글을 내가 처음 대해 본 것은 20여 년 전인 육군 상병 시절, 병영에 소리 없이 가을이 찾아들던 9월 어느 날이었다. 면회 온 애인이 갖고 왔다며 한 전우가 내게 건네준 전혜린의 에세이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였다.

   그때는 문장 사이사이에 번뜩이는 광기(狂氣)를 약간 발견한 것 외에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진 못했었다. 당시의 내 정신의 깊이나 넓이가 그런 관념의 언어들을 수용하고 소화하기에 너무 벅찬 탓도 있었거니와, 병영이라는 이질적인 세계가 내 정신적인 여유를 차단한 탓도 있었으리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하는 의문은 내 잠재의식 속으로 입력되었고.

   20여 년이 흐른 이제, 내가 다시 전혜린의 글을 대하게 된 것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똑같은 일이 연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무언가 변화의 출구를 찾고 있던 터에,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정공채 시인의 평전 ! 전혜린을 보는 순간 그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그 책을 읽는 며칠 동안 내가 책 속에 흠뻑 빠져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 주어진 상황과 여건이 그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는 반증이 되리라. 처음엔 좀 창피했었다. 40대 중반을 넘어선 두 아이의 아버지인 내가, 문학 지망생이나 사춘기 소녀들이 즐겨 읽을 법한 이 책을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읽는다는 사실이 왠지 쑥스러웠다.

   그러나 읽어감에 따라, 전혜린의 끝 가는데 없는 사고(思考)와 강한 개성에 차츰 빠져 들어갔다. 창피해 하던 나 자신이 자꾸만 부끄러워졌고, 반쯤 읽었을 때는 오히려 내 손으로, 서점에서 씌워준 표지 커버를 벗겨내고야 말았다. 앞표지 사진 속에 뚜렷이 심어진 전혜린의 안광(眼光)이 내게 감정이입을 해주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한 줄 한 줄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정공채 시인의, 일화를 적절히 담은 정치(精緻)한 구성과 시정어린 문장이 전혜린의 주옥같은 언어들과 발자취를 실감 있게 재생시켰기 때문이리라.

   수재들만 모이는 S대 법대에 입학했으나 법이라는 금제적인 카테고리가 자유에의 비상(飛翔)을 꿈꾸던 그녀의 뜨거운 감성과는 거리가 있음을 깨닫고 도중에 문학 쪽으로 방향을 전환, 독일로 문학수업을 떠났던 전혜린. 그곳에서 우수와 비애를 눈동자에 가득히 담고 돌아와서는 늘 문학적 창조에의 갈증에 허덕였던 전혜린.

   문학과 지()에 아낌없이 자신을 연소시키고 스스로 다짐했던 탈 평범을 위해 직업 사랑 돈 명예 같은,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기꺼이 외면하면서 하루하루를 화차(火車)처럼 불태웠던 전혜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의 권태를 특유의 광기로 극복하면서.

   헤세와 파스테르나크를 좋아했고 루이제 린저의 작품 속에 나오는 니나에게서 동질감(identity)를 느꼈던 전혜린. 가끔 술이라도 마시게 되면 메모지에다 섬광 같은 의식의 결정(結晶)을 남겼던 전혜린. 그렇게도 쓰고 싶어 하던 소설 하나 남기지 못하고 스스로 세상을 버리고 훌훌 떠나간 전혜린. 천재는 요절한다는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전혜린은 죽기 며칠 전 자신의 앞날을 암시하듯 죽음에 대한 생각을 글로 남겨 놓았다.

 

                죽음은, 누구의 죽음이나 엄숙한 사실이다.

                더구나 그것이 의식적으로 선택되고 논리적으로 사유(思惟)된 결과인 경우,

                우리는 무엇이 그를 죽음에 던져 넣는가를 알고 싶어 해도 마땅할 것이다.

 

   가득한 고뇌와 권태, 늘 깨어있는 의식, 그로 말미암은 환청 현상을 이기지 못해 오즈강에 몸을 던졌던 전설적인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처럼, 전혜린 또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보다는 차라리 자원한 파국을 택했던 것일까?

   전혜린이 남긴 마지막 편지를 보면 삶에의 의지와 죽음에의 유혹이 공존하고 있던 당시의 심정이 절규처럼 와 닿는다. 전혜린의 유고(遺稿)인 이 마지막 편지를 독자들과 함께 조용히 음미해 보고자 한다.

 

      쟝 아제베도에게

      어제 집에 오자마자 네 액자를 걸었다. 방안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네 냄새.

      갑자기 네 편지 전부를 벽에 붙이고 싶은 광적인 충동에 사로잡혔다.

      …. 너를 단념하는 것보다는 죽음을 택하겠어.

      …. 나의 지병(持病)인 페시미즘을 고쳐 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

      생명에의 애착을 만들어 줄 사람은 너야. 오늘밤 이런 것을 읽었다.

      ‘사랑, 사랑이란 무엇일까? 한 개의 육체와 영혼이 분열하여 탄소, 수소, 질소, 산소, 염, 기타의 각 원소로 환원하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 것이 사랑이다.’

      어느 자살자의 수기 중의 한 구절이야.

      쟝 아제베도!

      내가 원소(元素)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줘! 정말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나도 생명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

      그런데 가끔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나는 미치고 말아.

      내 속에 있는 이 악마를 쫓아 줄 사람은 너야. 나를 살게 해줘.

                                                                                             (196516일 새벽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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