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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유서

에세이 및 콩트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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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유서

 

최용현(수필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宿題) 둘을 들라면 나는 서슴없이 사랑과 죽음을 들고 싶다. 명예, (), 권력 따위는 다음 순서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예술작품, 특히 문학작품에서 다룬 주제가 이 두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고, 앞으로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크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사랑이란 삶 자체를 의미하는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개념으로서의 사랑이다.

   삶이 모든 인간에게 절박한 현실이듯이, 죽음 또한 누구도 비껴 갈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삶의 문제는 구체적 실체로서 누구에게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죽음의 문제는 그렇지 못한 게 사실이다.

   특히, 나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젊음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은 자신의 죽음을 언젠가 다가올 막연한 미래의 문제로 생각할 뿐 실체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죽는다는 사실이 불변의 진리이고, 또 그렇다고 태어난 순서대로 공평하게 죽을 수는 없는 것이고 보면,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극과 극을 치닫고 있는 오늘날의 모든 사회문제들, 세상을 뒤덮고 있는 물질 만능 풍조가 얼마나 무익하고 하찮은 것인가를, 죽음보다 더한 하중(荷重)으로 깨우쳐 줄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은 어떨까? 하루에 한 번이라도, 광화문 앞 대로에 우리의 이웃 누구의 장의행렬(葬儀行列)이 상두꾼의 상여소리와 함께 옛 모습대로 지나가는 것을 허용하고(실현 불가능한 일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우리가 매일 그 모습을 주위 빌딩에서, 길거리에서 바라볼 수가 있다면.

   그리하여 인간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하루에 한 번씩이라도 되새기게 된다면, 우리의 심성은 얼마나 순화될 것인가. 그리고 인생의 종착역이 어떤 것인가를, 물욕과 권세욕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하루에 한 번 만이라도 확인하면서 살아 갈 수 있다면.

   생의 의미가 무어냐 하는 문제는 너무 거창하니까 그만두기로 하고, 그저 한 줄기의 따스한 햇살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죽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아무리 구겨진 인생을 살아도 억울할 것도 없고.

   우리 주위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더러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름대로의 사연이야 있을 테지만.

   언젠가, 아내가 죽자 곧이어 남편이 비관 자살하여 신문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이 대학생을 가르치는 저명한 철학교수였기에 세상의 놀라움은 더 컸었다. 그가 사회의 지도급 인사였고, 그에게 두 아이와 노부모가 있었다는 것, 그런 등등 때문에 그의 자살이 무책임한 행위라고 지적한 글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목숨을 끊은 사람을 두고 무책임 하느니 현실도피니 하고 질책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나는 써진 지 이십 년이 넘은 유서 한 통을 보관하고 있다. 해발 8백 미터가 넘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그곳에 묻어달라며 내가 휴가 나온 때에 맞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내 동생이 남긴 유서이다. 이미 고인이 된 내 동생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한 편의 시 같고, 또 잘 다듬어진 수필 같기도 한 이 유서의 전문(全文)을 옮겨 적어 본다.

 

      아이야.

      여기서 접는다.

      207개월짜리 인생이다.

      화악산 제일 높은 봉우리, 그곳에 있다.

      올 땐 삽, 그리고 모든 필요한 것 준비해서 올라오라고 해다오.

      곡괭이도 가져오고, 돌이 많은 곳이니까.

      아이야.

      나로 인해 어떻게든 피해를 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새삼스럽게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으련 다.

      그런 평범한 말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냥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나쁜 놈이 되련다.

      아이야.

      뭇 사람들이 내 주검 앞에서 웃고, 슬퍼하고, 또 나름대로 곡해해서 한마디씩은 하겠지.

      그냥 둬, 그건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이건 얘기해다오.

      결코 어떤 철학에 의한 동요도, 누적된 증오의 순간적인 폭발도 아니라고.

      긴 시간 동안 내가 생각해서 택한 길로 가는 것이라고.

      아이야.

      이렇게 높은 이곳 여기에 묻히고 싶다고 말해다오.

      더 가까운 곳에 별들이 있고, 조용한 밤이 펼쳐지고.

      이곳엔 눈도 더 많이 올 거야.

      아이야.

      내게 돌아올 재산 같은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내 누나, 가난에 찌들어 움츠려버린 누나에게 주길 바라더란 말도 해다오.

      그것으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말이야.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라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아이야.

      그리고 내 기억은 되도록 빨리 잊어다오. 깨끗이 지워버려 다오.

      이건 나의 마지막 간절한 바람이었다는 걸 꼭 이야기해다오.

      모두 안녕히.

 

   유서치고는 잔인하리만큼 차분하게 쓴 글이다.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한 마리 표범처럼 정상(頂上)에서 포효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혹시 이 글을 읽고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면 영화 사관과 신사에서 남자 주인공이 하던 대사 한 토막을 들려주고 싶다.

   ‘이 세상에 혼자라고 생각하면 더 이상 상처받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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