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몇 년 전 여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해마다 아버지 제사 때에 맞추어 여름휴가를 얻어 고향 형님 댁에 내려가곤 했었다. 올해도 함께 동해안으로 가자는 친구들의 성화가 있었으나, 아버지 산소가 있는 선산으로 가기로 맘을 굳히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을 했다. 제사 하루 전날, 아이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향했다.
대학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여름방학 때는 연례행사처럼 선산아래 개울가로 가재를 잡으러 가곤 했었다. 그러나 읍으로 이사를 하고부터는 벌써 몇 년째 가재를 잡으러 가지 못했다. 그런 해는 여름이 가고 나면 내내 허전하곤 했었다.
어린 시절, 집에서 일하는 머슴아저씨가 아침 일찍 소를 몰고 선산이 있는 화악산에 나무를 하러 가면 해거름에 돌아올 땐 찬합에다 잡은 가재를 가득 담아오곤 했었다. 어떤 때는 소잔등에 가득 실은 나무 덤불 위로 잘 익은 보리포도가 출렁거릴 때도 있었다. 나는 집 앞 담 벽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가 저만치 소가 보이면 환호를 하며 달려 나가곤 했었다.
아버지 제사를 지낸 다음날 아침, 망설이는 형수를 설득하여 형님과 형수, 그리고 나와 아내, 이렇게 넷이서 선산 가까이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아이들을 떠맡게 된 어머니는 함께 떠나는 우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화악산 기슭에서 버스를 내린 우리는 저수지 옆길을 따라 걸었다. 물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내 키만큼 자란 물풀들이 빛이 바랜 채 이슬을 머금고 촘촘히 서 있었고, 수면과 맞닿은 산허리에는 안개가 자욱이 서려 있었다. 코끝에 와 닿는 아침공기가 싱그러웠다. 소녀처럼 즐거워하는 아내를 보면서 함께 오길 정말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기 전에 어서 산을 올라야지 생각하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때 금색가루를 탄 먹물로 홍포(紅布)에 쓴 ‘學生慶州崔公…’이라는 글자를 보고 할아버지를 ‘학생’이라고 지칭하는 것 같아 의아스럽게 생각되어 아버지께 물어보았었다.
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홍포를 바라보시며 ‘네 할아버지는 평생 동안 공부만 하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학생이라고 쓰는 거란다.’고 하셨다. 벼슬을 지내지 않은 사람의 명정(銘旌)에는 으레 그렇게 쓴다는 것을 그 훨씬 후에야 알게 되었다.
몇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명정에 ‘學生’이라고 씌어져 있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아버지에겐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께서는 당시의 소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으나 농사일을 하는 틈틈이 책을 읽으셨다.
연세가 듦에 따라 자꾸만 도수가 높은 돋보기를 사 오시는 것을 나는 안타깝게 바라보곤 했었다. 인근 사람들이 길흉사가 있을 때면 늘 아버지를 찾아오셨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혼례 택일도 해 주시고 아기 이름도 지어 주시고 장례일도 돌봐 주셨다.
선산이 보이는 산등성이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이마와 등허리에 흘러내리는 땀을 씻어 주었다. 선산 아래 개울가엔 몇 군데 민가가 있었고 군데군데 까만 염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상큼한 풀 냄새가 코끝에 와 닿았다. 이윽고 선산에 도착하니 해가 머리 위에 떠올라 있었다. 까마득히 산 아래에 넓은 들판과 우리가 옆으로 지나온 저수지가 보였다. 잠자는 듯 평화스런 모습이었다.
형과 나는 간단히 성묘를 하고 형수와 아내는 아버지 산소에다 갖고 온 음식을 차렸다.
“저기는 조부모, 그 위에는 증조부모, 그 위에는 고조부모….”
형에게서 선묘(先墓)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형수가 “그럼 여기가 우리 자리군”하며 아버지 산소 아래를 가리키며 겸연쩍게 웃었다. 우리는 아버지 산소에 절을 하고 갖고 온 낫으로 간단히 성묘를 끝낸 다음 다시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개울에서 가재를 잡기로 했다.
형과 형수는 개울 아래에서 올라오면서, 나와 아내는 위쪽에서 내려가면서 잡기로 했다. 도중에 만날 때까지 어느 쪽이 많이 잡나, 어느 쪽이 더 큰놈을 잡나 시합하기로 했다.
가재는 비린내를 좋아한다. 특히 개구리 냄새를 좋아한다. 나와 아내는 개구리를 잡아 꼬챙이 끝에 묶어서 개울을 따라 내려가면서 약간씩 물이 고인 곳에 넣고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돌 틈에 숨어 있던 가재가 처음엔 겁 없는 작은놈부터 나오고 나중엔 큰놈도 따라 나온다. 슬금슬금 기어 나와서 개구리에 붙을 때, 꼬챙이를 살짝 들어 올려 가재의 허리를 낚아채면 된다. 잘하면 한 자리에서 수십 마리는 잡을 수 있다.
거무스레한 큰 놈 한 마리와 몇 번의 실랑이를 했다. 가재 사냥꾼에게 여러 번 시달린 적이 있었을 법한 이런 놈과의 대치(?) 때는 정말 몰아의 경지가 된다. 이런 놈은 좀처럼 먹이에 선뜻 다가서지 않는다. 약간만 낌새가 달라도 몸을 사리기 때문이다. 천신만고 끝에 잡은 그놈을 아내가 한 번 쥐어 보려다가 그놈이 집게발을 쫙 벌리는 바람에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잡은 가재가 비닐봉지에 반쯤 찼을 무렵 형 쪽과 만나게 되었다. 내년에 또 오자며 형수가 내게 신신당부를 했다. 형 쪽이 더 많이 잡은 것 같았고, 내가 잡은 그 거무스레한 놈이 제일 컸다. 내가 그놈을 꺼내다가 형에게 건네려고 하는 순간, 그놈과 눈이 마주쳤다. 섬뜩했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의 환영(幻影)이 뇌리에 스쳤다. 형도 그놈을 보더니, 이놈은 이 개울의 왕쯤은 되는 모양이라며 도로 놓아주자고 했다.
나는 ‘왜 아버지의 환영이 떠올랐을까?’ 생각을 하며 잡았던 가재를 모두 개울가에 쏟아 넣었다. 하산 길에 들어서면서 나 혼자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도 나는 이 길을 올라올 것이다. 후일 내가 죽어서도 다시 이 길을 올라올 것이다.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때는 또 내 아이들이 이 길을 올라올 것이다. 어쩌면 내가 영원히 살 곳은 조상들이 묻혀있는 이곳이 아닐까?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있는 사이, 저 아래 읍내로 가는 도로에 까마득히 뽀얀 먼지가 움직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읍내에서 버스가 오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집에 두고 온 아이들 생각이 났다. 내년엔 꼭 아이들을 데려와야지 생각하며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