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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의 이야기

영화에세이

by 월산처사, 따오기 2023. 4. 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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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의 이야기(Regarding Henry)

 

최용현(수필가)

 

   ‘헨리의 이야기(Regarding Henry)’는 ‘졸업’(1967년) 이후 오랜 공백 끝에 ‘워킹 걸’(1988년)로 재기에 성공한 마이클 니콜스 감독이 1991년에 연출한 가족영화이다. 우연한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중년남자가 다시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하여 삶과 사랑, 가족의 의미에 대해 차분하게 조명하고 있다.

   어느 한 부분에서도 특별히 시선을 끌만한 요소는 없지만,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극의 흐름이 매끈하다. 할리우드 최고의 인기스타 해리슨 포드의 섬세한 연기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한스 짐머의 감미로운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부부싸움에 등장하는 주요 메뉴(?)와 그 해법(解法)이 모두 들어있으니, 부부가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다 .

   주인공 헨리(해리슨 포드 扮)는 아름다운 아내 사라(아네트 베닝 扮), 딸 레이첼과 함께 뉴욕에서 살고 있는 저명한 변호사이다. 헨리라는 이름만 들어도 상대방 변호사가 변론을 포기할 만큼 그는 유명하고 유능하다. 헨리는 집에서도 일밖에 모른다. 아내와 딸에게도 쌀쌀하고 냉정하다. 그 때문에 그의 가정에는 늘 찬바람이 분다.

   영화는 병원 측의 과실로 남편을 잃은 매튜 부인이 낸 의료사고 소송에서 병원 측 변호를 맡은 헨리가 열변을 토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헨리는 교묘하고 치밀한 변론으로 병원 측에 승리를 안겨준다. 억울하게 패소한 매튜 부인은 원망에 찬 눈길로 헨리를 쳐다본다.

   어느 날 밤, 담배를 사러 동네 구멍가게에 갔던 헨리는 때마침 가게 주인을 협박하고 있던 강도가 쏜 총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다. 바로 병원에 옮겨져 생명은 건졌으나 식물인간이 되고 만다. 며칠 후 깨어난 헨리는 재활원으로 옮겨졌지만, 말도 못하고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한다.

   유능한 변호사에서 졸지에 갓난아기 수준으로 떨어진 헨리는 다시 말을 배우고 걸음걸이도 배운다.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가족들의 눈물겨운 도움으로 조금씩 회복되어 간다. 혼자 핫도그도 사먹고 포르노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도 가고, 집에 돌아올 때는 레이첼에게 예쁜 강아지도 한 마리 사올 만큼….

   레이첼의 도움으로 다시 글을 읽게 된 헨리는 과거의 기억을 하나씩 되찾게 되자, 자신이 이루어놓은 성공에 회의를 갖기 시작한다. 그 동안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며 위선에 찬 행동을 해왔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헨리의 치료비 때문에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된 헨리부부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기로 하고 새 집을 보러간다. 돌아오는 길에 헨리는 아내의 손을 꼭 잡는다. 전에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 아내가 감격해 하자, 헨리는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에게 열렬히 키스를 한다.

   한편, 아빠를 닮아 총명하고 공부도 잘하는 레이첼은 집에서 가까운 중학교에 진학하기를 원했으나, 부부는 1년에 30명만 선발하여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시키는 영재학교에 입학시킨다.

   헨리의 직장복귀를 환영하는 파티가 열린다. 헨리는 아내가 자신의 동료 변호사와 정을 통해왔음을 알아내고 아내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문을 박차고 나간다. 그러나 그도 역시 회사 내의 한 아가씨와 불륜관계였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심한 자괴감에 빠진다. 호숫가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긴 헨리는 과거를 청산하고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기 때문에 억울하게 패소한 매튜 부인을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항소 때 승소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자료를 넘겨준다. 그리고 회사에 찾아가 변호사 사직서를 내고 집으로 돌아온다.

   다음날, 부부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딸이 다니는 영재학교를 찾아가 ‘그 동안 레이첼을 영재로 키우기 위해 12년을 잃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잃게 하고 싶지 않아요.’ 하면서 딸을 학교에서 데리고 나온다.

   단풍이 물든 교정에서 헨리부부가 레이첼을 데리고 나오는 마지막 장면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포근하면서도 정겨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첫 장면에서의 진눈깨비 날리는 뉴욕 거리와 뚜렷하게 대비되는 이 장면은 감미로운 주제음악과 함께 진한 여운으로 남는다.

   이 영화는 ‘기억 찾기’라는 독특한 소재를 통하여 중년부부가 실생활에서 부딪치게 되는 여러 문제에 대한 성찰과 함께 해법도출을 시도하고 있다. 영화의 세계는 허구의 세계이지만 영화에서 다루는 소재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서 헨리에게 닥친 불행은 누구에게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인생에 있어서의 하나의 전기(轉機)이다.

   그것은 한 순간의 사고나 우연한 만남일 수도 있고, 한 권의 책, 한 편의 영화일 수도 있다. 프랑스 여류작가 사강(F. Sagan)은 단편집 ‘길모퉁이의 카페’에서 인간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시선, 한 마디의 말, 한 순간의 충동 따위의 우연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수긍이 가는 얘기이다 .

   이 영화에서 스토리의 대부분을 헨리의 재기(再起) 과정에 할애한 것은 인간은 결코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물리치료사를 비롯하여 아내와 딸, 가정부, 이들 모두의 따뜻한 애정과 보살핌이 있었기에 헨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또, 총알이 머리에 박히기 전까지의 헨리에게 부여된 냉혹하고 위선적인 모습이 영재교육의 결과임을 암시하면서, 새롭게 태어난 헨리로 하여금 딸을 영재학교에서 데리고 나오게 함으로써 그런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는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열을 가진 우리 학부모들에게도 시사해 주는 바가 적지 않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분명하다. 가족들은 성공한 아빠보다는 엄마와 함께 손잡고 걷고, 아이들과 함께 앨범을 보아주는 그런 아빠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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