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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픽 하이츠

영화에세이

by 월산처사, 따오기 2023. 3. 29.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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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픽 하이츠(Pacific Heights)

 

최용현(수필가)

 

   내 집을 갖는다는 것은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집주인과 세입자는 임대차보호법의 조문이 어떠하든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없다. 세입자가 집주인을 상대로 다툼을 벌이려면 그 집에서 쫓겨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그러한 통념을 비웃기라도 하듯 세입자에게 농락당하는 집주인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퍼시픽 하이츠(Pacific Heights)’는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태평양 빌라’ 쯤 되는데, ‘미드나이트 카우보이’(1969년)와 ‘마라톤 맨’(1976년)을 감독한 존 슐레진저가 1990년에 연출한 서스펜스 스릴러이다. 집주인과 세입자가 부딪치는 과정을 실감나게 보여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빌라왕의 전세금 반환문제 때문에 시끄럽지 않은가.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동거하는 맞벌이 부부 드레이크(매튜 모딘 扮)와 패티(멜라니 그리피스 扮)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 고풍스런 다세대주택 ‘퍼시픽 하이츠’를 75만 달러에 매입한다. 은행대출로도 돈이 모자라서 아래층 방 둘을 세놓는다. 한 방엔 일본인 부부가 들어오고, 또 한 방엔 6개월분 집세를 선납하겠다고 한 카터(마이클 키튼 扮)가, 먼저 입주 신청을 한 흑인 남자를 제치고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카터가 약속과는 달리 전세보증금을 내지 않고 입주를 하면서 바로 갈등국면이 시작된다. 그는 교활하고 악질적인 부동산사기꾼으로 이 집을 빼앗으려고 들어온 사람이다. 그는 입주하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고 친구들을 끌어들여 밤낮 망치질과 전기드릴로 소음을 일으킨다.

   화가 난 드레이크가 전기와 가스를 끊어버리지만, 카터의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은 정식 계약으로 입주한 세입자는 법으로 보호된다며, 오히려 드레이크더러 카터에게 사과하고 즉시 전기와 가스를 넣어주라고 한다. 의기양양해진 카터는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낸다. 바퀴벌레를 대량으로 길러서 옆방으로 보내 일본인 부부를 내쫓는데 성공한다.

   드레이크는 변호사를 찾아가 소송을 해보지만 패소하여 카터의 법정 비용까지 물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무릎 부상과 임신으로 패티가 직장을 그만두게 되자, 이들 부부는 경제적으로 쪼들리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패티가 유산(流産)을 한다.

   그러나 카터의 마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꽃을 들고 능청스럽게 병문안을 온다. 폭행을 유도한 계산된 행위임을 알 리 없는 드레이크가 카터를 폭행하는 바람에 출동한 경찰에게 잡혀간다. 그 결과, 드레이크는 ‘카터가 있는 곳에서 500피트 이내에는 접근하지 못한다.’는 처분을 받게 된다. 자기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카터는 드레이크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패티에게 음흉하게 접근하지만, 패티는 단호하게 뿌리친다. 밤중에 드레이크가 몰래 집으로 들어오자, 카터는 기다렸다는 듯이 총을 쏜다. 그리고 쓰러진 드레이크의 손에 총을 쥐어주고 유유히 사라진다. 다행히 드레이크는 목숨을 구하지만, 이 사건 역시 카터의 정당방위로 처리되고 만다.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뛰어난 것일까? 뱃속의 아이를 잃고 남편마저 총에 맞아 부상을 입자, 패티가 복수를 하러 나선다.

   카터가 없는 틈에 카터의 방으로 들어간 패티는 거기서 카터의 어릴 때의 사진을 찾아내고, 추적 끝에 카터가 현재 투숙하고 있는 호텔을 알아낸다. 그 호텔을 찾아간 패티는 카터가 외출한 사이에 호텔방에 들어가는데, 카터가 남편 드레이크의 이름으로 카드를 만들어 돈을 물 쓰듯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한다. 패티는 즉시 카드결재정지 조치를 하고 그의 사기행각을 경찰에 알린다.

   카터는 경찰에 구속되지만 다음 범행 대상자인 백만장자 부인을 교묘하게 속여서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다. 이성을 잃은 카터는 몰래 집에 들어와 부상에서 회복한 드레이크를 초주검이 되도록 구타하고, 다시 패티에게 접근하여 전기드릴로 가해하려 한다. 이때 패티는 드레이크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고, 결국 카터는 자신이 벽에 박아놓은 쇠기둥에 찔려죽는 것으로 이 악몽 같은 사기극은 끝이 난다.

   이 영화는 순진한 집주인 부부와 악질 세입자간의 갈등을 통하여 미국 사회의 법제(法制)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사실적으로 비판, 고발하고 있다. 여기서 세입자로 일본인과 흑인이 등장하는 것은 이 다세대 주택이 다민족으로 구성된 미국사회를 상징하는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배우를 보고 고른 영화는 실망할 수 있어도 감독을 보고 고른 영화는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존 슐레진저 감독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모순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이를 영상화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카터의 사이코적 가학행위를 점층법(漸層法)으로 연출함으로써 관객들을 서서히 극 속으로 흡입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버디’(1984년)와 ‘멤피스 벨’(1990년)에서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준 매튜 모딘과 ‘워킹 걸’(1988년)에서 직장여성의 성공스토리를 보여준 멜라니 그리피스는 부부로 나와 처음에는 좌충우돌하지만 마지막에는 합심하여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배트맨’(1989년)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마이클 키튼은 악질 사기꾼 역을 능청스럽게 해냄으로써 영화의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패티 부부가 ‘퍼시픽 하이츠’를 깨끗이 수리하여 90만 달러에 팔려고 내놓는 결말부분에서, 앞으로도 이러한 비극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존 슐레진저의 메시지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어떤 신혼부부가 집을 사러오자, 패티가 처음 이 집을 사러 왔을 때 집주인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한다.

   “빅토리아 양식으로 건축됐죠. 돈이 모자라면 아래층 두 방을 세놓으면 부담을 줄일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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