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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세이

by 월산처사, 따오기 2022. 3. 27.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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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Poppoya)

 

최용현(수필가)

 

   일본의 한적한 시골 호로마이역에서 홀로 역장으로 근무하는 사토 오토마츠(다카쿠라 켄 扮)는 아버지에 이어 2대째 철도원으로 근속하여 이제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 이곳 호로마이 노선은 예전 탄광촌이 번창할 때는 활기가 넘쳤지만 그 후에 적자노선이 되어 조만간 운행이 중단될 예정이다. 그는 철도원 정복을 입고 눈이 수북이 쌓인 플랫폼에 서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다.

   17년 전, 오랜 기다림 끝에 임신을 한 아내(오타케 시노부 扮)가 기쁨에 겨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역으로 달려왔었다. 그리고 흰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딸을 낳았다. 아들을 낳아 3대째 철도원을 이어가기를 바라던 오토마츠는 곧 마음을 고쳐먹고 딸에게 ‘눈(雪)의 아이’라는 뜻의 유키코란 이름을 지었다.

   두 달쯤 지났을까. 온몸이 불덩이 같은 유키코를 안고 혼자 기차를 타고 도시의 병원에 갔던 아내가 돌아오는 기차를 오토마츠가 수신호로 맞이하자, 아내는 ‘당신은 죽은 딸도 깃발을 흔들며 맞이하는군요.’ 하면서 눈처럼 차갑게 식은 유키코의 시신을 끌어안고 넋이 나간 듯 뇌까렸다. 아내가 그에게 볼멘소리를 한 것은 그때 한번 뿐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깊은 병을 얻은 아내가 병원에 입원할 때도 오토마츠는 아내를 홀로 병원에 보냈고, 젊었을 때부터 증기기관차를 운행하며 함께 일했던 동료 센(고바야시 넨지 扮)의 부인이 아내 곁을 지켜주었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한지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토마츠가 병원에 도착하자, 센의 부인은 ‘그동안 왜 안 왔어요? 왜 안 울어요?’ 하고 따져 물었지만, 오토마츠는 ‘철도원은 집안 일로 울 수가 없어요,’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아내가 떠난 지 2년, 정년퇴직을 하는 해의 새날이 밝았다. 오토마츠가 플랫폼에 쌓인 눈을 쓸어내고 있을 때, 7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인사를 하더니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역무실에 인형을 놓고 사라졌다.

   그날 오후에 절친 동료 센이 찾아왔다. 막차를 보내고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얘기를 나누었다. 올 가을에 정년퇴직을 하는 센은 인근 리조트에 중역으로 가기로 했다면서, 자신이 잘 말해볼 테니 퇴직 후에 함께 가자고 했다. 그러나 오토마츠는 ‘나는 철도 일밖에 모른다.’며 거절했다.

   그날 밤, 낮에 왔던 아이의 언니라며 사토라는 6학년 소녀가 인형을 찾으러 왔다. 근처에 사는 사토 할아버지의 손녀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 소녀는 오토마츠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더니 입술에 뽀뽀를 하고는 인형을 그대로 놔두고 갔다. 인형을 자세히 보니 예전에 오토마츠가 갓난아이였던 딸 유키코에게 사준 인형과 같은 것이었다.

   센이 아침 첫차로 돌아간 후, 철도청 간부인 센의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알아봐달라고 했다면서, 퇴직 후에 할 수 있는 철도 관련 일을 찾아봤는데 여의치 않다는 것과 호로마이 노선은 3월까지만 운행하고 폐선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다음날 저녁, 어저께 왔던 소녀들의 언니라며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히로스에 료코 扮)이 찾아왔다. 오토마츠는 팥죽을 데워주면서, 그 여학생이 철도에 관해 궁금해 하는 것들을 알려주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오토마츠가 막차 운행을 점검하러 간 사이에 그 여학생은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찌개를 끓여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오토마츠는 오랜만에 받아보는 따뜻한 저녁상에 감격한다.

   그때 전화가 와서 사토 영감과 통화를 하던 오토마츠는 그 소녀들이 사토 영감의 손녀가 아니고 갓난아기 때 죽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여학생을 포근히 안아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유키코, 어제는 초등학교에 가는 모습과 중학교에 가는 모습을 보여주더니, 오늘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17년간 자란 모습을 아비에게 보여주는구나.”

   그러자 유키코는 ‘아버지는 기쁜 일이 없으셨잖아요. 저까지 자식노릇도 못하고 죽어버렸고요. 저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워요.’ 하고 말하고는 인형을 들고 사라진다. 그 인형은 유키코가 죽었을 때 관에 넣어준 것이었다. 오토마츠는 그날도 역무일지에 ‘이상 없음’이라고 기록하고 하루일과를 마친다.

   다음날, 첫 기차가 들어올 때 오토마츠는 호로마이역 플랫폼에서 눈 위에 쓰러져 죽은 모습으로 발견된다. 연락을 받고 온 센과 그의 아들, 동료들이 오토마츠의 관을 기차의 운전석에 태운다. 센이 오토마츠의 역장 모자를 쓰고 마지막 운전을 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철도원(Poppoya)’은 아사다 지로의 동명소설을 1999년에 영화화한 것으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있는 슬픈 이야기이다. 일본의 국민배우 다카쿠라 켄이 역장 역을 맡아 아시아태평양영화제 및 몬트리올영화제 남우주연상 등 전 세계에서 19개 상을 휩쓸었다. 이 영화의 배경인 호로마이역의 실제 이름은 이쿠토라역이고 홋카이도 중간쯤에 있는 작은 역이다.

   이 영화는 대부분 오토마츠 역장의 플래시백으로 이루어져있다. 가업(家業)을 잇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오토마츠는 일 때문에 딸과 아내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는데, 이런 우직하면서도 무책임한 구세대 가장(家長)의 행적을 죽은 딸을 환생시켜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구세대와 신세대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여기서, 생후 두 달 만에 죽은 유키코가 7살, 13살, 17살의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나타나 이야기를 나눈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생각건대, 과학적으로는 무리가 있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예견한 유키코의 귀신이 아버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그 동안의 노고를 위로해주고 딸과의 행복한 추억을 안고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해주려고 찾아와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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