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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성시

영화에세이

by 월산처사, 따오기 2022. 3. 4.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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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성시(悲情城市)

 

최용현(수필가)

 

   ‘비정성시(悲情城市)’는 영어제목 ‘A City of Sadness’가 말해주듯 ‘슬픔의 도시’라는 뜻으로, 대만의 허우 샤오셴 감독이 1989년에 연출한 영화이다. 중국어 영화로는 처음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스크린’ 선정 20세기 100대 영화에서 5위를 차지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년), 차이밍량 감독의 ‘애정만세’(1994년)와 함께 대만 뉴웨이브의 3대 걸작으로 꼽힌다.

   이 영화는 대만이 51년간의 일본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1945년부터 장개석의 국민당이 모택동의 공산당에 패퇴하여 대만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한 1949년까지 4년 동안 대만에서 일어난 일을 임가네 네 아들의 행적을 통해 보여준다. 이들의 이야기는 대만의 근대사와 맥을 같이 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천황의 무조건 항복 방송이 나오고 있을 때, 대만 최북단 기륭시에 사는 임가네에는 장손이 태어난다. 첫째 문웅(진송용 扮)은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돕고 있고, 의사인 둘째 문상은 일본군의 군의관으로 징집되어 필리핀 전선으로 간 뒤 소식이 없다. 셋째 문량(고첩 扮)은 본토에 건너가 일본군에 물자를 대는 장사를 하고 있고, 8살 때 나무에서 떨어진 후 귀머거리에다 벙어리가 된 넷째 문청(양조위 扮)은 지우펀에서 사진관 일을 하고 있다.

   문청과 가까운 관영과 그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본토에서 건너온 국민당을 환영했으나, 이들이 점령군 행세를 하며 대만인을 핍박하기 시작하자 반발심을 갖게 된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관영의 여동생 관미(신수분 扮)는 문청이 전축으로 독일가곡 ‘로렐라이 언덕’을 들려주자 필담(筆談)으로 로렐라이 전설을 이야기해준다.

   “옛날 독일 라인강 언덕에 살고 있던 아름다운 여자귀신이 늘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자 배를 타고 지나가던 어부들이 모두 그 노랫소리에 혹하여 정신 줄을 놓는 바람에 배가 암초에 부딪치곤 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다가올 비극을 암시하는 것일까. 국민당이 대만에 들어온 후 갑자기 식량문제와 실업문제, 인플레 문제 등이 봇물처럼 터져서 민생이 파탄할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비리를 저지른다. 이에 대만인들이 거세게 항의하며 소요(騷擾)가 발생하자, 국민당 군은 대만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민간인들에게 발포를 하는 2.28 사건이 터진다.

   셋째 문량은 상하이에 본거지를 둔 폭력조직과 함께 거래를 하다가 마약 밀수에 손을 대는데, 그러다가 조직원들과 트러블이 생기자 이들은 문량이 해방 전에 일본군을 도왔다며 고발한다. 문웅이 상하이파 두목을 찾아가 뇌물까지 줘서 겨우 석방을 시키지만, 매국노로 몰린 문량은 혹독한 고문을 받아 반미치광이가 되고 만다.

   전쟁이 끝나도 소식이 없던 둘째 문상의 유품이 집에 도착한다. 옷소매 안에 자신의 아이들에게 쓴 것으로 보이는 유서가 들어있었다. ‘너희들은 삶을 중시하고 주관적으로 살아라. 아빠는 죄가 없다.’라고 씌어있었다. 붙잡혀서 전범으로 처형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살아서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그의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은 오열한다.

   매일 문청의 집에 모여서 시국토론을 하던 관영과 그의 친구들은 산간지역에 숨어서 반정부 활동을 시작한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서 처형당할 뻔 했다가 석방된 문청은 관영을 찾아가 자신도 싸우고 싶다고 의사표시를 하는데, 관영은 필담으로 ‘내 동생 관미와 결혼해서 생업에 충실하기 바란다.’고 간곡히 조언한다.

   그 무렵, 임가네의 한 직원과 문량을 고발했던 상하이파 조직원 사이에 시비가 붙는다.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간 문웅도 싸움에 말려들게 되고, 결국 문웅은 상하이파 두목이 쏜 총에 맞아 목숨을 잃고 만다.

   문웅의 장례를 치른 후 결혼식을 올린 문청과 관미는 사진관에서 번 돈으로 관영이 활동하는 조직에 자금을 대주며 아들도 낳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관영과 친구들이 국민당 군에게 총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든 문청은 관미, 아들과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다. 사흘 후 사진을 인화하던 문청은 찾아온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간다.

   세월이 흐르고, 늙은 아버지와 폐인이 된 셋째 문량, 그리고 1945년 8월 15일에 태어난 문웅의 아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한다. ‘1949년 12월, 본토는 공산화되고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철수하여 타이베이를 임시수도로 정했다.’는 자막이 나오면서 영화가 끝난다.

   국민당 군의 가혹한 진압으로 약 3만 명의 대만인이 희생된 2.28사건은 우리나라의 제주4.3사태나 5.18광주민주화운동처럼 대만에 계엄령이 내려진 1947년부터 금기어(禁忌語)가 되었다.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되자, 허우 샤오셴 감독은 역사의 격랑이 한 가족을 어떻게 붕괴시키는지 먼발치에서 바라보듯 카메라를 고정시켜놓고 관찰자의 시선으로 다큐멘터리처럼 158분 동안 담담하게 보여준다. 말 못하는 문청은 관찰자가 되어 사진을 찍었고, 관미는 그날그날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허우 샤오셴 감독은 간단한 항의조차도 할 수 없었던 당시 대만인의 위상(位相)은 귀머거리이면서 벙어리인 문청과 다르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네 아들 중에서 가장 순해서 평탄하게 살 것 같았던 문청이 가족사진 한 장만 달랑 남기고 잡혀가는 장면은 2.28사건이 남긴 비정한 뒷모습이다.

   문청 역을 맡은 양조위는 ‘비정성시’를 통해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지게 되는데, 그는 홍콩 출신으로 대만 말을 전혀 못하기 때문에 감독이 고심 끝에 벙어리 캐릭터로 만들었다고 한다. 산간마을 지우펀은 금맥이 발견되면서 한때 화려하게 번창했으나 금맥이 끊어지면서 한산해졌다. 그러다가 이 영화 덕분에 다시 대만의 손꼽히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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