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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

영화에세이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7.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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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西便制)

 

최용현(수필가)

 

   전쟁고아 송화를 양딸로 삼아 떠돌이생활을 하고 있던 소리꾼 유봉(김명곤 )은 과부 금산 댁과 눈이 맞아 그의 아들 동호와 함께 새 가정을 꾸린다. 금산 댁이 자신의 아이를 낳다가 죽자, 유봉은 어린 송화와 동호를 데리고 장터에서 약장사들을 따라다니거나, 대갓집 잔치에서 소리 품을 팔며 살아간다. 송화에게는 소리를, 동호에게는 북을 가르친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장터에 아코디언과 트럼펫이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우리 고유의 소리는 외면당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유봉은 소리에 대한 애정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송화(오정해 )와 동호(김규철 )를 혹독하게 훈련시킨다. 그러자 동호는 입에 풀칠도 못하는 그깟 소리 배워서 뭐해?’ 하며 집을 뛰쳐나가 버린다.

   유봉은 송화마저 떠나 버릴까봐 걱정하면서도 송화의 소리에 한을 심어주기 위해 송화의 탕약에 눈을 멀게 하는 약을 넣어 함께 달인다. 송화가 거의 시력을 잃게 되자, 유봉은 송화의 목청이 갈라지도록 소리연습을 시키면서 이렇게 말한다.

   “서편제는 말이여. 가슴을 칼로 저미는 듯한 한()이 사무쳐야 되는데, 니 소리는 곱기만 하고 한이 없어. 너는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눈까지 멀었으니 한이 남보다 열 배 스무 배는 더 있을 법도 한데 어찌 그런 소리가 안 나오냐?”

   송화가 실명(失明)한 것에 대해 가슴 한 구석에 죄책감을 지니고 있던 유봉은 죽기 전에 송화에게 그 일을 사과한다. 유봉이 죽자, 혼자가 된 송화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소리를 하는 맹인 소리꾼이 된다.

   ‘서편제(西便制)’2008년에 타계한 이청준의 연작소설 남도사람중에서 서편제소리의 빛을 바탕으로 1993년에 임권택 감독이 만든 영화이다. 그의 명콤비 정일성이 촬영을 맡아 거장(巨匠)다운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했고, 음악은 작은 거인 김수철이 맡았다. 김수철이 만든, 소금(小芩)으로 연주하는 소리길의 애잔한 선율을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핑 돈다. 서편제의 OST 음반은 70만장 이상 팔려나갔다.

   이청준 소설가의 연작소설 중 세 번째 작품인 선학동 나그네를 영화화한 천년학’(2006)을 비롯해 이어도’, ‘축제등 그의 작품 여러 편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2007년 칸영화제에서 전도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이창동 감독의 밀양(Secret Sunshine)’ 역시 그의 소설 벌레 이야기가 원작인 것을 보면 그는 우리 것에 천착(穿鑿)한 문단의 거목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복학생이던 70년대 후반, 당시 인기 있던 포켓판 월간지 수필 공모에 글 한 편을 써서 보냈는데, 심사위원을 맡은 이청준 씨가 그 글을 선()하면서 상당히 고무적(鼓舞的)인 심사평도 함께 써주셨다. 그때 거의 한 달 동안 하숙집으로 독자들의 편지가 쇄도하던 기억이 새롭다.

   각설하고,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돌담길에서 유봉과 송화가 덩실덩실 춤추면서 번갈아가며 진도아리랑을 부르고, 동호가 흥에 겨워 북장단을 치면서 한바탕 신명나게 노는, 5분이 넘는 롱 테이크 장면이다. 예전에는 무심코 흘려들었던 가사들이 이젠 허투루 들리지 않고 귀에 속속 들어온다.

 

          사람이 살면 몇 백 년 사나 개똥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 난다

           소리 따라 흐르는 떠돌이 인생 첩첩이 쌓인 한을 풀어나 보세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내 가슴 속엔 수심도 많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음~ 아라리가 났네

 

   이 장면으로 일약 유명해진 그 돌담길은 전남 완도 남쪽에 있는 조그만 섬 청산도에 있다. 이곳은 옛 농촌의 풍광을 그대로 지닌 온통 푸른 섬으로, 이 영화 이후 매스컴에서 하도 많이 소개가 되어서 아마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동호는 어찌되었을까? 세월이 흐른 후, 한약재 수집상을 하는 동호는 남도를 돌아다니며 아버지와 누이를 찾고 있다. 어느 날, 동호는 소리꾼 부녀가 보성 소리재에서 살았다는 얘기를 듣고 수소문 끝에, 어느 주막에서 늙은 홀아비와 함께 살고 있는 송화를 찾아낸다. 송화에게 소리를 청하면서 동호는 오랜만에 북채를 잡는다.

   심청가의 한 자락이 밤하늘에 울려 퍼진다. 송화는 죽은 아비와 똑같이 북장단을 치는 그가 동호임을 금방 알아채지만 아는 체 하지는 않는다. 둘은 몸을 맞대지 않고도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는 것처럼 땀과 눈물범벅이 되어 밤새 소리와 북으로 서로의 한을 풀어내고 아침에 헤어진다. 송화가 거처를 옮기려고 주막을 떠나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소리꾼 남매의 가슴시린 이야기 서편제는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100만 관객을 돌파하였다. 워낙 잘 만들어진 영화라서 그렇겠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극장을 찾은 후에 불기 시작한 중고등학교의 단체관람 열풍도 일조를 했다. 그는 나중에 송화 역을 맡은 오정해의 결혼식 주례를 서주기도 했다.

   서편제와 동편제는 모두 전라도 지방의 판소리 유파이다. 서편제는 섬진강의 서쪽 지방에 전해져온 소리로 섬세하고 여성적이며 감칠맛이 있다. 반면에 동편제(東便制)는 섬진강의 동쪽 지방에 전해져온 소리로 담백하고 남성적이며 진중(鎭重)하다. 소리꾼 유봉은 죽기 전에 송화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동편제가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하다면, 서편제는 애절하고 정한이 많다고들 하지. 허지만 한을 넘어서게 되면, 동편제도 서편제도 없고 득음(得音)의 경지만 있을 뿐이다.”

   지금까지 본 방화(邦畵) 중에서 감명 깊게 본 영화 한 편만 꼽으라고 하면 나는 기꺼이 서편제를 꼽을 것이다. 20년 전에 처음 볼 때는 참 잘 만든 우리 영화구나.’ 싶었는데, 나이 들어서 다시 보니 한 장면 한 장면이 사무치게 아름답고 또 그립다.

   헬스로 몸을 다듬은 훤칠한 아이돌 그룹과 가릴 데만 겨우 가린 늘씬한 걸 그룹이 군무(群舞)를 하면서 부르는 K팝에 익숙한 우리 청소년들이 우리 소리에 대한 애정과 한()이 절절히 녹아있는 이 영화를 꼭 한번 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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