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서부영화는 ‘황야의 무법자’(1964년)로 시작해서 ‘용서받지 못한 자’(1992년)로 끝난다는 말이 있다. 전자는 무명배우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스타로 만든 작품이고, 후자는 이미 서부영화의 아이콘이 된 그가 주연과 감독을 맡아 만든 작품이다.
‘황야의 무법자’는 이탈리아 출신의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평소 존경하던 일본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의 걸작 ‘요짐보’(1961년)를 서부극으로 각색하여 만든 최초의 마카로니웨스턴이다. 다음해(1965년) 속편 ‘석양의 건맨’이, 그 다음해(1966년) 무법자 3부작의 완결편인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가 만들어졌다.
2008년도 흥행작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이 ‘석양의 무법자’에서 제목과 주인공의 캐릭터를 차용하여 일제강점기의 만주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이다. 정우성, 이병헌, 송강호가 각각 타이틀 롤을 맡아 열연했고, ‘김치웨스턴’이란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영화 ‘석양의 무법자’는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0년대에 세 사람의 총잡이가 숨겨진 돈뭉치를 찾아나서는 이야기이다. 세 주인공을 소개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마지막 장면까지 3시간이나 되는 긴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망토를 걸치고 늘 시가를 입에 문 현상금 사냥꾼 블론디(선한 자, 클린트 이스트우드 扮)는 온갖 악행으로 현상수배를 받고 있는 멕시코 출신의 총잡이 투코(추한 자, 엘리 월러치 扮)와 동업을 하고 있다. 블론디가 투코를 잡아 넘기면서 현상금을 받아내고, 투코가 교수형을 당하려는 순간 투코의 목을 매고 있는 줄을 쏴서 그를 구해 달아나는 것이다.
한편, ‘천사의 눈(angel eye)’이란 이름과는 딴판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인과 폭력을 일삼는, 뱀눈에 매부리코의 냉혹한 악당 엔젤아이(악한 자, 리 반 클리프 扮)는 20만 달러의 돈뭉치를 빼돌린 빌 카슨이란 자를 추적하고 있다.
블론디는 현상금이 오르지 않는 투코에게 동업을 끝내자면서 현상금을 혼자 차지하고 그를 사막에 방치한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투코는 블론디를 역습하여 뙤약볕이 작열하는 사막에 오랫동안 끌고 다니면서 거의 초죽음 상태로 만든다.
이때 두 사람은 중상을 입어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빌 카슨을 만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투코는 20만 달러가 묻혀있는 공동묘지의 이름만을, 블론디는 구체적인 묘비명만을 듣게 된다. 둘이 힘을 합쳐야 돈뭉치를 찾을 수 있게 된 블론디와 투코는 다시 야합하여 함께 공동묘지로 향한다.
도중에 두 사람은 북군의 포로가 되는데, 포로수용소의 선임하사인 엔젤아이는 죽은 빌 카슨의 옷을 입고 그의 행세를 하는 투코를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고문하여 공동묘지의 이름을 알아낸다. 그러나 묘비명을 알고 있는 블론디는 자존심이 강해서 쉽게 불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돈을 찾으면 반씩 나누기로 타협한다. 투코에겐 수갑을 채워 거한(巨漢)에게 감시를 하게 한다.
블론디가 떠나자,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던 투코는 거한을 물리치고 수갑을 제거한 후 공동묘지로 향한다. 투코와 블론디가 공동묘지에 도착하여 마침내 숨겨놓은 20만 달러를 찾아내는데, 그때 엔젤아이가 도착한다. 세 사람은 돈뭉치를 앞에 두고 최후의 승자를 가려내기 위한 삼각 대결을 벌인다.
선악의 구분이 분명했던 고전 할리우드 서부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의 주인공 세 사람은 모두 선과 악, 추(醜)로 지어진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탐욕스럽다. 세 사람간의 도덕적인 차이는 별로 없지만 악을 담당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영화적인 정의(正義)이다보니 이 영화도 권선징악으로 귀결을 짓는다.
존 포드 감독과 존 웨인으로 대표되는 정통 서부영화들은 미개척지인 미국 서부를 정복해 나가는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냈다. 반면 마카로니 혹은 스파게티 웨스턴이라 불리는 서부영화들은 미국의 무명 혹은 한물간 배우들이 유럽의 영화감독들과 함께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대충 만든 싸구려 영화라는 인식이 강했다.
실제로 당시 이탈리아 영화계의 현실은 할리우드에 비해 아주 열악하여 스턴트의 개념조차 없을 정도였다. 이 영화 속에서 기차선로 옆에 바짝 엎드려서 달리는 기차를 이용하여 수갑줄을 끊는 장면은 투코 역을 맡은 엘리 월러치가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연기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마카로니웨스턴이라고 해서 모두 대충 만든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의 카메라 움직임을 보자. 주로 파노라마 영상을 사용하면서도 원거리의 롱 샷도 자주 등장하고, 막판 대결장면은 롱 테이크로 잡았다. 또 공동묘지에서 투코가 뛰어가면서 돈뭉치가 묻힌 묘비를 찾는 장면에서는 극도의 클로즈업을 사용하여 긴장감을 최고조로 이끌어내고 있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주제음악은 이제 ‘서부영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아이콘이 되었을 정도로 결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서부극의 전성기 이후에도 그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년)나 ‘시네마 천국’(1988년)에서 보여준 음악은 이제 입신(入神)의 경지에 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경이롭다.
무표정한 얼굴에 약간 빈정거리는 듯한 서부극 주인공의 캐릭터를 창출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에서 활약하고 있고, 악당전문 배우로 유명세를 얻은 리 반 클리프는 여러 서부극에서 활약하다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 코믹하면서도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준 엘리 월러치는 99세를 눈앞에 두고 2014년 6월에 타계했다.
무법자 3부작을 통하여 마카로니 웨스턴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는 등 영화사에 길이 빛날 업적을 남긴 거장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마지막으로, 혼신을 다해 연출한 10편의 영화를 남기고 60세(1989년)에 세상을 떠났다.
레오네 감독의 서부극에 대한 열정은 그의 제자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 예순이 훨씬 넘은 나이에 명품 서부극 ‘용서받지 못한 자’를 내놓고, 그 영화를 고(故)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에게 헌정하겠다고 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바로 그의 수제자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