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1990년대 초,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비디오 가게를 차린 적이 있었다. 아내에게 가게를 맡겨 놓고 글을 쓸 요량으로. 월간지 여러 곳에 고정칼럼으로 에세이와 콩트, 삼국지인물론 등을 연재하던 시절이었다.
낮 시간이 공짜(?)로 생기다 보니 시간은 넘쳐나서 매일 비디오 서너 개를 집으로 가져와서 보곤 했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 저 영화 내용이 뒤죽박죽 섞여버려 스토리가 헷갈리기도 했다. 어쨌든 내 인생을 통 털어 그때 가장 많은 영화를 봤다.
일 년쯤 되었을 때, 주인이 직접 쓰겠다며 가게를 비우라고 했다. 억울했지만 주인하고 싸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마찬가지였으므로 할 수 없이 땡처리 업자를 불러 비디오테이프 한 개당 500원씩을 받고 넘겼다. 그때 팔지 않고 간직한 비디오가 딱 3개 있었는데, ‘벤허’(1959년)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년), 그리고 ‘닥터 지바고’였다.
2009년 1월호부터 영화에세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7080세대들이 아련한 추억에 젖어볼 수 있는 그런 영화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첫 영화로 1965년 작 ‘닥터 지바고(Doctor Zhivago)’를 골랐다. 지금이 겨울의 한복판인데다, 눈이 거의 오지 않는 남쪽지방에서 성장한 탓에 눈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남아있는 것도 한 요인일 것이다.
‘닥터 지바고’는 러시아의 시인이며 소설가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소설로, 1958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발표되었으나 당시 소련 정부의 압력으로 상을 받지는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인이며 의사인 지바고가 아름답고 열정적인 여인 라라를 만나 운명적으로 사랑과 이별을 반복하는 가슴 저리는 로맨스를 서사적으로 그렸다.
러시아에 혁명의 기운이 일기 시작할 무렵, 8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양부모의 집에서 기거하던 유리 지바고(오마 샤리프 扮)는 의사 공부를 하면서 다정다감한 청년으로 성장한다. 자연스레 양부모의 딸 토냐(제랄딘 채플린 扮)와 결혼하게 되고, 군의관으로 동원되어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로 나간다.
한편,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아름답고 이지적인 소녀 라라(줄리 크리스티 扮)는 어머니의 정부(情夫)였던 후안무치한 건달 코마로프스키(로드 스타이거 扮)의 꾐에 빠져 순결을 뺏기게 되자, 어느 무도회장에서 그에게 권총을 쏘지만 총상만 입히고 만다.
볼셰비키 혁명에 앞장서고 있는 남자친구와 결혼한 라라는 군에 입대한 남편의 행방이 묘연하자 간호사를 자원하여 그를 찾아 전장(戰場)으로 향한다. 거기서 지바고와 라라는 의사와 간호사로서 만나 함께 의료봉사를 하면서 사랑이 싹트지만, 전쟁이 끝나자 헤어지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지바고는 혁명의 여파로 가산(家産)이 몰수당한데다, 자신이 요주의 인물이 되어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지바고의 가족들은 볼셰비키 장교인 배다른 동생(알렉 기네스 扮)의 도움으로 우랄산맥 근처의 오지로 떠난다.
유리아틴 부근의 한 외딴 집에서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불안하고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지바고는 시내 도서관에 갔다가, 그곳에서 사서(司書)로 일하고 있는 라라와 재회한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마치 운명처럼 서로에게 빠져들어 사랑을 불태우게 된다.
어느 날, 지바고는 시내에서 라라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빨치산에게 납치된다. 거기서 다시 군의관 생활을 하게 된 지바고는 눈보라 속에 혼자 남겨지게 되자 탈영하여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라라의 집으로 찾아온다. 거기서 지바고는 자신의 가족들은 국외탈출을 시도하고 있고, 라라의 남편은 반동분자로 몰려 처형되었음을 알게 된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두 사람은 전에 지바고가 살던 설원 속 외딴집으로 피신한다. 라라는 지바고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지바고는 열정적으로 시를 쓴다. 이때 다시 볼셰비키와 결탁한 코마로프스키가 나타나 극동지역으로의 도피를 제안하자, 지바고는 라라를 그와 함께 떠나보낸다. 앞으로 태어날 아기의 장래를 위해서.
몇 년 후, 극도로 쇠약해진 지바고는 모스크바에서 전차를 타고 가던 중 차창 밖에서 걸어가는 라라를 발견하고 급히 차에서 내려 쫓아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심장발작으로 길바닥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만다.
세월이 흐르고, 지바고의 배다른 동생은 지바고를 꼭 닮은 한 소녀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어릴 때 양아버지인 코마로프스키가 잡았던 손을 놓아버리는 바람에 고아가 된 지바고와 라라의 딸임을 확인하면서 영화가 끝을 맺는다.
거장 데이비드 린이 연출한 이 영화는 광활한 시베리아의 설원을 배경으로, 소설이 지닌 서정적이고 서사적인 전개방식을 최대한 살리면서 절제된 대사와 세련된 시어(詩語)들을 오롯이 영화 속에 담아내어 아카데미상을 6개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데이비드 린 감독의 대표작 ‘콰이강의 다리’(1957년),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년)와 함께 영화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작으로 손색이 없다.
이 영화에서 지바고의 아내로 나오는 제랄딘 채플린은 영국 출신의 불세출의 명우 찰리 채플린의 딸이다. 찰리 채플린이 56세 때, 미국 최고의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인 19세의 우나 오닐과 결혼하여 낳은 첫딸이다.
“우나 오닐을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사랑을 찾아 헤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찰리 채플린이 남긴 말이다. 그 시절에도 사랑은 나이와 국경을 초월했던 모양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지바고가 을씨년스런 외딴 통나무집에서 창문의 성에를 입김으로 불며 창밖을 내다볼 때, 러시아의 민속악기 발라 라이카 현(絃)의 선율을 타고 ‘Somewhere My Love’가 애잔하게 울려 퍼지면서 노란 꽃물결들이 파노라마처럼 일렁이는 장면이 자꾸만 뇌리 속에 맴돌았다.
세상이 온통 은백색으로 물드는 눈 오는 밤에 ‘닥터 지바고’를 보면서 젊은 날의 추억에 젖어 보는 것은 긴긴 겨울밤을 보내는 멋진 낭만이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