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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촉을 유비에게 빼앗긴 익주목 ‘유장’

삼국지 인물열전

by 월산처사, 따오기 2018. 12. 2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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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촉을 유비에게 빼앗긴 익주목 유장

 

최용현(수필가)

 

   양자강 등 4개의 강이 흐른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사천성(四川省)2008년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곳이다. 옛날에는 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을 서촉 혹은 서천이라 불렀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익주였다. 이곳은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하여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익주목 유언이 죽자 그의 아들 유장(劉璋)이 그 자리를 계승했다. 그는 암약(暗弱)한 인물이었다. 인근지역 한중의 지도자 장로(張魯)가 세력을 키우며 국경을 어지럽히자, 화가 난 유장은 장로의 어머니와 동생을 살해했고, 그 때문에 장로와는 철천지원수가 되고 말았다.

   이즈음 한중은 조조군에게 패퇴한 마초를 따라 이곳으로 넘어오는 서량의 주민들 때문에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조조는 장로를 회유하기 위해 관직을 주었고, 이에 고무된 장로는 서촉을 통째로 집어삼킬 궁리를 했다. 장로가 국경을 침범해오려 한다는 보고를 받은 유장은 회의를 소집했지만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이때 문관 장송(張松)이 일어나 제가 예물을 들고 조조를 찾아가 조조의 대군이 한중을 공격하도록 하여 장로가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하고 말했다. 본시 겁이 많은 데다 아무런 복안이 없던 유장이 달리 의견이 있을 리 없었다.

   장송은 곧바로 허도로 출발했고, 서촉에서 온 장송을 접견한 조조는 대뜸 네 주인 유장은 어찌하여 해마다 조공을 올리지 않느냐?’며 힐문했다. 장송은 길이 험한 데다 도적들이 가로막아 조공을 올릴 수가 없었다.’고 변명을 했다. 그러나 조조는 내가 이미 중원을 깨끗이 다 쓸었는데 도적이 어디 있단 말이냐?’하며 역정을 냈다.

   유장의 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장송은 조조로부터 홀대를 받았다. 화가 난 장송이 조조의 자존심을 건드리며 저항을 해보았지만 조조의 기분을 상하게 한 죄로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나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형주에 들른 장송은 유비로부터 극진한 후대를 받고, 지니고 있던 서촉 지도를 유비에게 넘겨주었다.

   유장은 귀국한 장송으로부터 조조가 아닌 형주의 유비에게 요청하여 장로의 군사를 막는 것이 좋겠다는 보고를 받는다. ‘그렇게 되면 유비에게 서촉을 뺏기고 만다.’며 황권 왕루 등의 중신들이 극렬히 반대했지만, 순진한 유장은 기어코 유비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한다.

   “시끄럽다! 유비와 나는 피를 나눈 종친인데 어찌 그가 내 땅을 빼앗겠느냐?”

   난세에 종친이 어디 있는가. 드디어 제갈량이 제시한 천하삼분지계에 따라 호시탐탐 촉을 노리던 유비는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새로 얻은 군사(軍師) 방통과 노장군 황충, 맹장 위연 등과 함께 서촉으로 입성한다. 유비는 한동안 유장과 친밀하게 지냈지만 결국 속셈이 다른 두 사람의 사이는 틀어지고 말았다.

   뒤늦게 유비의 속셈을 알아차린 유장은 숨어서 유비를 도운 장송과 그의 가솔들을 목 베고 결사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부성을 지키고 있던 촉의 맹장 양회와 고패가 유비에게 잡혀 목이 떨어지는 바람에 부성이 함락되었다. 유장은 장임과 유괴 냉포 등현 등 네 장수에게 성도의 외곽요충지인 낙성을 사수하라고 명했다.

   네 장수는 연합작전을 펼쳐 유비군의 군사 방통을 낙봉파에서 죽이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새로 합류한 제갈량과 장비 조운 등이 맹공을 퍼붓자, 결국 낙성은 함락되고 끝까지 버티던 용장 장임도 붙잡혀 참수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유장을 도우러 온 마초까지 제갈량의 계책에 빠져 유비군에게 사로잡혔다.

   드디어 유비군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와 성도를 포위했다. 성안에서는 주전파와 주화파가 맞서 격론을 벌였지만, 아직도 성안에는 3만 명의 군사가 남아있다며 결사항전하자는 의견이 더 우세했다. 그러나 유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부자(父子)가 서촉을 다스린 지 20년이 넘었으나 이렇다 할 공덕을 쌓지 못했소. 또 유비와의 3년에 걸친 전쟁으로 온 들판에 시신이 넘쳐있으니 모두가 내 탓이오. 차라리 항복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해주어야겠소.”

   결국 성문을 열고 항복한 유장은 유비로부터 진위장군이라는 직책을 받고 변방인 남군의 공안으로 떠난다. 거기서 유장은 귀양 아닌 귀양살이를 하다 쓸쓸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후세의 사가들은 유장을 어리석고 나약한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다. 물론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이므로 패배자인 그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점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난세의 지도자로서 유장의 처신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우선, 장로가 침공해올 길목에 장임 같은 용장을 미리 국경에 배치하여 대비했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유비에게 군사지원부터 요청한 것은 그의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그의 곁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충간하는 문관과 죽기를 각오하고 익주를 지키겠다는 무장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충정을 헤아리지 않고 일부 중신의 꾐에 빠져 외부의 힘으로 장로의 침공을 막겠다고 오판을 한 것은 그의 자질과 리더십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또 마지막에 유비군이 성도를 향해 밀어닥치자, 3만 군사를 놔두고 전의를 상실한 채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성문을 열어 항복한 것도 난세의 지도자로서는 너무도 나약하고 성급한 처사가 아닌가 싶다.

   굳이 유장의 편에서 변론을 한다면, 난세에는 대부분의 권력자들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주민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강요하는데 비해, 유장은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결단을 내렸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정상참작을 해주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유장은 승자만이 살아남는 난세에 적합한 인물은 아니었고, 치세(治世)에나 어울리는 순진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유장이 촉을 유비에게 넘겨준 것은 그의 실책이라기보다는 유비에 비해 확연히 처지는 그릇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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