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천하의 패권을 놓고 마지막까지 다툰 조조와 유비는 최고의 영웅으로 꼽힌다. 또, 삼국지 전반부에 등장하여 조조와 건곤일척의 자웅을 겨룬 원소와, 물려받은 나라를 지키는 데 탁월한 수완을 보인 손권은 최고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꼽힌다. 공손찬 원술 등은 다시 그 아래로 꼽힐 수 있으리라.
당대 최강의 전력으로 조조와 승부를 겨루다가 패망한 하북의 강자 원소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원소(袁紹), 자는 본초(本初). 4세(四世)에 3정승을 배출한 명문가의 얼자(孼子) 출신이나 귀공자 같은 준수한 풍모, 기라성 같은 휘하 인재, 막강한 무력과 탄탄한 지역기반 등 패자(覇者)의 조건을 가장 많이 갖춘 인물이다.
젊은 시절, 조정의 초급장교였던 원소는 독재자 동탁이 멋대로 황제를 바꾸려 하자, ‘천하는 동공(董公)의 것이 아니오!’라고 일갈하고 근거지인 기주로 달아났다. 동탁의 회유정책에 따라 발해태수에 봉해진 원소는 그곳에서 인재를 모으며 세력을 키워갔다.
이때 동탁을 타도하자는 조조의 격문을 보고 각지의 군웅들이 모여들었는데, 원소는 모여든 제후들 중에서 맹주(盟主)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개성이 강한 여러 제후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규합하기에는 그의 리더십은 어딘지 모르게 부족했고, 그 결과 제후연합군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한 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제후들은 모두 자신의 근거지로 돌아가 힘을 기르면서 호시탐탐 천하를 차지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이에 원소도 기주로 돌아가 착실히 인재를 모으고 군마를 양성하면서 북방 유주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공손찬과 불꽃 튀는 사투를 벌였다.
한편, 독재자 동탁이 여포에게 피살되자, 동탁의 잔당 이각과 곽사를 패퇴시킨 조조는 황제를 호위하며 도성으로 입성, 단숨에 조정의 실권자가 되었다. 황제를 등에 업고 천하를 호령하는 위치에 선 것이다.
이 무렵 원소도 공손찬을 패퇴시키고 하북의 4개주를 관할하는 막강한 실력자가 되었다. 조조가 원술과 여포를 패망시키자 삼국지 전반부 최대의 라이벌인 양웅(兩雄)의 대결은 이제 필연적인 귀결이 되고 있었다.
유비를 정벌하기 위해 조조가 군사를 일으키자, 원소의 일급 참모인 전풍은 허도가 비어있다며 즉시 출병하여 허도를 점령하자고 했다. 허도를 차지하고 황제를 옹위하는 것은 패자(覇者)가 되는 지름길이 아닌가. 그러나 원소는 총애하는 막내아들이 앓고 있다는 핑계로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후, 마음을 가다듬은 원소는 조조를 치려고 30만 대군을 일으켰다. 이때는 조조에게 빈틈이 없었으므로 전풍과 저수 등이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다.’며 말렸다. 그러나 이미 결심을 굳힌 원소는 전풍을 옥에 가두고 출정했다. 조조도 군사를 이끌고 맞서니 드디어 양웅의 불꽃 튀는 대결이 시작되었다.
이때 원소는 자신이 자랑하는 두 맹장 안량과 문추를 차례로 내보내 조조군을 거세게 밀어붙였으나 조조진영에 포로로 잡혀 있던 관우에게 두 장수가 차례로 목이 떨어지는 바람에 패퇴하고 말았다.
원소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70만 대군을 이끌고 허도로 향했다. 전풍은 옥중에서 ‘지금 싸우면 패할 수밖에 없다.’며 출정을 말리는 글을 올렸고, 원소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한 저수는 굳이 지금 출정하려면 전면전은 불리하니 지구전을 펼쳐야 한다고 간했다.
원소는 불길한 소리를 한다며 저수마저 옥에 가두었다. 조조는 정병 7만을 이끌고 원소의 대군과 맞섰다. 삼국지 전반부 최대의 승부처인 관도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두 진영은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십대 일의 병력 차이 때문에 원소군이 더 유리한 형국이 되었다.
그러나 모사 순욱의 조언으로 다시 용기를 얻은 조조가 원소의 군량기지가 허술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기습부대를 보내 원소군의 군량창고를 불태우자, 원소군은 사기가 무참히 꺾이면서 전세가 단숨에 역전되었다. 승기를 잡은 조조가 총공격을 감행하니 원소의 주력부대는 거의 괴멸되고 만다.
원소는 겨우 수백 기를 이끌고 도주하다가 세 아들이 이끌고 온 지원군과 함께 다시 20만 대군을 수습하여 반격에 나섰다. 조조가 이번에는 모사 정욱의 계책대로 배수진을 치고 맹공을 퍼부으니 원소는 또다시 패퇴한다.
울화병이 난 원소는 피를 토하며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한때 제후연합군을 이끌었고, 4개주를 호령하던 효웅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종말이었다. 원소가 죽자 아들들이 대권을 놓고 다투는 바람에, 강병 백만을 자랑하던 하북 4개주는 너무도 쉽게 조조의 깃발 아래로 들어가고 만다.
기주성이 함락되었을 때 관사에 있던 원소의 둘째며느리 견(甄) 씨가 조조의 맏아들 조비의 눈에 띄어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된다. 결국 패전한 원소는 며느리까지 조조의 아들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원소는 패자(覇者)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냉철한 결단력이 부족했다. 허도가 비어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을 때 사소한 문제 때문에 용단을 내리지 못한 것은 그의 치명적인 실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유능한 인재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의 안목과 식견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출병할 때 직언하는 참모를 옥에 가두어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하더니, 격전의 와중에서도 후처가 낳은 셋째아들을 자신의 후사(後嗣)로 세우는 어리석음까지 범했다.
또 한 가지, 사촌동생인 남양의 군벌 원술을 포용하여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적대관계에 있었다는 점이다. 조조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야 했다면, 당연히 혈육인 원술과 함께 힘을 합쳐서 남북에서 협공을 했어야 했다.
삼국지 최고의 영웅인 조조의 라이벌로 대부분 유비를 꼽는다. 그러나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조조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룬 원소야말로 조조의 진정한 라이벌이 아니었나 싶다. 이 무렵 유비는 조조와는 대적할 꿈도 꾸지 못하고 마냥 도망 다니기 바빴으니 말이다.
역사는 원소에게 ‘강북의 패권을 조조에게 넘겨주고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지라.’고 명한다. 역사의 심판은 이렇듯 냉엄하고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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