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수필가)
역사에 가정법을 쓰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손견이나 그의 아들 손책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 삼국지의 스토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천하의 패권을 놓고 조조와 최후까지 결전을 벌인 사람은 유비가 아니라 이들 중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들 부자(父子)의 짧고 헌걸찬 생애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손견(孫堅), 자는 문대(文臺). 강동 오군 출신으로,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의 후예이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할 무렵, 조상들의 장지(葬地)에서 영롱한 광채가 솟아올라 구름을 오색으로 물들이며 하늘까지 뻗쳤다고 하는데, 손견을 낳을 무렵엔 창자가 쏟아져 온 성문을 휘감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손견은 총명하고 활달한 기상을 타고났는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의 영명함이 인근에 널리 알려진 것은 그가 열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어느 강의 포구에 갔을 때였다.
거기서 수적(水賊)들이 노략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손견은 즉시 옆에 있는 언덕으로 뛰어올라가 칼을 빼들고 여러 병사를 지휘하듯 호령했다. 수적들은 관병들이 잡으러 온 줄 알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그는 곧바로 두목을 뒤쫓아 가서 목을 베어 들고 돌아왔다.
이 일로 그의 명성이 온 고을에 퍼졌고, 주민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에 의해 고을의 치안책임자가 되었다. 그 후에도 그는 탁월한 지략과 용맹으로 도적을 소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마침내 그곳 장사군의 태수가 되었고, 한당 황개 정보 조무 등 용맹무쌍한 네 장수를 거느린 막강한 실력자가 되었다.
그는 황건적 토벌에도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후 동탁이 대권을 잡고 공포정치를 하자, 각지의 제후들이 ‘타도 동탁’의 기치를 내걸고 연합군을 구성하는데 그도 장사태수로서 군사를 이끌고 참여했다. 그는 직정적(直情的)인 성격 그대로 선봉을 자원하여 동탁의 선봉장 화웅을 따끔하게 혼내주며 강동의 호랑이로 불리던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결국 동탁은 도성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를 했다. 연합군은 동탁이 버리고 떠난 낙양으로 입성했는데, 선봉으로 궁궐에 입성한 손견은 한 우물에서 십상시의 난 때 잃어버린 한(漢)의 옥새를 발견했다. 그는 옥새가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은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웅지를 품은 채 군사를 이끌고 근거지인 강동으로 향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연합군의 맹주(盟主) 원소는 한실의 종친인 형주자사 유표에게 ‘손견이 옥새를 훔쳐 달아나고 있으니 그를 잡아서 옥새를 뺏어라.’고 밀서를 보냈다.
손견과 유표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손견은 유표군의 장수 황조의 매복계에 걸려 무참하게 전사한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너무 저돌적으로 맹진하다가 가슴 속에 품은 큰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스러지고 마는 손견.
그의 열일곱 살 난 맏아들이 부업(父業)을 이었으니 그가 바로 강동의 작은 호랑이 백부(伯符) 손책(孫策)이다. 아비 손견의 용맹한 기상과 어미 오부인의 미모를 물려받아 빼어난 용자(容姿)를 지닌 그를 강동 사람들은 손랑(孫郞)이라 부르며 잘 따랐다.
어릴 때부터 아비와 장수들을 따라다니며 병법과 창검술을 익힌 손책은 지용(智勇)을 겸비한 무장으로 성장했다. 처음 참가한 전투에서 아비를 잃었지만, 손책은 절망하지 않고 착실하게 실력을 기르며 기반을 쌓아가고 있었다.
서주자사 도겸의 침략을 받은 손책은 한동안 남양의 군벌 원술에게 의지하며 지냈다. 청년이 된 그는 선부(先父)가 이루지 못한 웅지를 펼치기로 결심, 물려받은 옥새를 담보로 원술에게서 군사 3천명을 빌려 옛 장수들과 함께 강동으로 돌아온다.
그때 손책은 의형제이면서 친구요 동서인 주유와 맹장 태사자, 주태 등을 새로 얻었고, 강동의 두 현사(賢士) 장소와 장굉을 초빙하여 군웅으로서의 기반을 갖추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강동 일대를 착착 평정, 오나라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그가 어느 전투에서 적장 한 명을 고함으로 말에서 떨어져 죽게 하고, 또 다른 적장 한 명을 자신의 겨드랑이에 끼워서 죽인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소패왕(小覇王)이라 불렀다. 이곳 출신의 패왕 항우에 버금가는 영웅이라는 뜻이다.
그는 강동과 강남 일대를 주름잡던 군웅과 도적떼들을 모조리 평정한 다음, 황성에 사신을 보내 대사마 벼슬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당시 조정의 실권자인 조조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는 조조를 쳐서 단숨에 천하의 패권을 잡으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계획을 추진하기도 전에 자객의 습격을 받아 온 몸에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손책이 상처를 치료하고 있을 때, 원소의 사자가 와서 함께 힘을 모아 조조를 치자고 제의했다. 그는 쾌히 승낙하고 사자를 접대하는 잔치를 열었다. 그 자리에 우길이라는 선인(仙人)이 찾아왔는데 많은 백성들이 우르르 몰려가 경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손책은 강동 땅에 자기보다 더 우러름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시샘을 느끼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선인을 잡아서 죽여 버렸다. 그러자 손책은 갑자기 귀신에 씐 듯 날뛰기 시작했고, 아물었던 상처까지 재발하여 중태에 빠졌다. 그는 자신의 최후가 왔음을 직감하고 아우 손권을 불러 후사를 부탁한다.
“아버지와 내가 창업할 때의 간난(艱難)을 한 시도 잊지 말고 영토를 잘 보전하기 바란다. 나라 안의 일은 장소에게 묻고, 나라 밖의 일은 주유에게 물어서 처결토록 하라.”
이때 손책의 나이 겨우 스물여섯 살이었다. 이후 아우 손권이 다스리는 오나라는 그저 물려받은 땅을 지키기에 급급할 뿐, 한 번도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지 못한다.
소패왕 손책, 성격이 급하고 매사에 너무 과격한 결점이 있었지만 호방한 기개와 쾌활한 기상은 가히 천하를 삼킬 만했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능히 정예군을 이끌고 양자강을 건너 조조군을 기습했을 것이다.
강동의 호랑이 부자 손견과 손책, 대를 이어 웅지를 펼치다가 중도에 꺾여버린 참으로 아까운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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